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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가 권서경 Mar 30. 2023

기억의 기록

눈에 담기 버거운 장면을 간직하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남기지만 정작 그것들을 다시 보는 일은 내 경우엔 거의 없다. 그런 주제에 사진 찍는 걸 꽤 좋아해서 내 핸드폰은 늘 용량이 아슬하다.
겨울의 날카로움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바람을 맞으며, 친구들과 몇 달 전부터 계획한 섬 여행에 다녀왔다. 여행이 시작된 순간부터 모두가 핸드폰을 들고 바쁘게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한 시간 몸을 싣게 될 배라든가, 신축인지 멀끔하고 아기자기하던 펜션의 외양이라든가, 허기를 달래려 섬에 발을 딛자마자 찾아간 식당의 꽃게탕이라든가. 해변가의 모래사장을 돌아다니면서는 동영상을 찍기도 했다. 지형과 조수 간만의 차로 생긴 호수 같은 커다란 물웅덩이를 발견했을 땐 절경에 연신 감탄하며 크게 다르지도 않은 사진을 여러 장 남겼다. 밤에는 숙소로 돌아가 술과 바비큐를 하고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거기에 나온 베트남 달랏을 다음 여행지 후보로 정했다. 그날 우리는 하루를 꽉 채워 비일상을 만끽했다.
잠자리에 눕기 전, 낮에 장을 볼 때 사온 트럼프 카드로 잠시 게임을 하자며 둥글게 모여 앉았다. 술이 들어간 탓인지 늦은 새벽이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게임이 무르익어 내내 깔깔거리며 웃느라 다음날에는 목이 쉬어있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다 같이 몇 번이고 돌려보며 더욱이 눈물 쏙 빠지게 웃다 잠들었다.

그렇게 목이 쉬어라 웃었건만 아침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다시 보니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가로 좁은 화면에 갑갑하게 갇힌 내 모습은 애석하게도 영 공감이 가질 않았다. 배를 쥐어짜 내는 고통까지 느끼며 얼굴을 묻고 웃던 게 무색하리만큼 그들에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앞뒤 없이 1분 남짓한 시간만 도려내 텅 빈 도화지에 덩그러니 붙여 놓은 듯한 영상이 그 새벽 우리가 느낀 유쾌함대변할 순 없기 때문일 거다.
그것들을 보면 순간의 나는 이미 끝나고 지금의 나완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오래 남기고 싶어 찍은 사진으로 정작 회고하자면 헛헛함만 떠오른다. 온전한 찰나를 떠올리지 못해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남겨둔 사진과 영상을 이후에 찾아보는 일이 거의 없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 하던데. 선물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지 원할 때 끌어당겨 차지할 수 없는 것이어서, 잊었으면 하는 기억은 영영 기억하고 잊지 않길 바란 기억은 눈 깜빡하면 희미해져 있다.

그렇다면 기억은 인간에게 내려진 벌 같은 게 아닐까. 몰아의 황홀함만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없다는 건. 채 망각하지 못한 것을 목구멍 깊은 어딘가 묵직하게 늘어뜨리고 살아가야 한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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