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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가 권서경 Feb 06. 2021

2021

2020.12.05

스무살 성인이 되고 3, 4년 정도 지나고부터는 연말이니 새해니 하는 것들에 영 무관심해졌다.  시간 맞춰 티비를 틀어놓기만 해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보신각의 종소리를 들은 지가 언제더라. 구태여 돌이켜 본 적은 없다.
새해의 시작이라고 해봤자 어제 같은 하루가 지나 다시 오늘 같은 내일이 시작될 뿐이고, 굳이 의미를 두자면 이 땅덩어리 안에서 나를 정의하는 숫자가 한 자리 올라가는 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반 백이네, 반 오십이네, 하다못해 반 서른이라는 해괴한 말까지 탄생할 만큼 노소를 막론하고 나이 먹음이 중대사인 세상이니, 쿨한 척하려 애쓴다며 누군가는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다. 해가 바뀌는 것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 나로서는 이런 태도가 쿨하고 멋짐의 정의가 되진 않는다.

비아냥을 들은 적이 있다는 건 아니다. 이건 그냥, 습관적인 자기 변론 같은 거다. 사람은 자신과 크게 관계가 없는 대상에 있어서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며, 그 취합물에 대해 맹목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경향이 있다는 걸 바로 얼마 전 수차례 깨우친 바 있다. 그래서 어줍잖게 붙은 습관이다.

늘어놓은 글을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인데 나는 딱히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어지러운 사회라지만 그래도 세상은 소수의 아름다움으로 지켜지고 있다 생각하고, 살아있는 많은 것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마 그럴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냥 시간이 흐르는 것에 별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않게 된 거지 싶다. 예전에는 모든 것에 부지런하게도 의미를 두었다.
내 인생, 이제껏 암울했지만 지나간 일 년과 함께 전부 다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가짐을 새로 하자. 새해만 시작된다면, 이쯤 했으면 반전처럼 제2의 인생이 펼쳐질 때도 됐겠지. 라는 밑도 끝도 없이 막연한 믿음. 듣고 있던 신께서 어디 행복 맡겨놨냐며 황당해했을 수도 있고.
알 게 뭐란 말인가, 나는 행운이 필요했다. 기대와 설렘이 교차하는 벅찬 마음으로 1월 1일을 맞이하는 카운트다운을 열심히 외치기도 했다. 딱 그 정도만큼은 부지런했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 내가 많이 지쳤음을 인정했다. 보답 없는 믿음은 피로가 된다.
원인이야 다양하겠다. 나아지려는 의지가 사실은 없었든, 그 전능하시다는 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주겠거니 오만에 잠겨 있었든.
좌우간 그건 세상에 신 같은 건 없다는 확신만 비뚤게 굳혀주는 과정이었다. 내가 종교를 믿지 않아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제 코로나19 하루 확진자가 600명을 넘어섰다. 정부에서는 서울의 밤을 잠시 멈추겠노라 선언했다. 이천 이십년의 끝자락을 걷는 지금 간만에 그때의 간절함을 떠올린다. 짧았던가 길었던가 가늠할 여유도 없이 지나가는 한 해가 이렇게 야속했던 적이 없다.
너무 많은 고통이, 좌절이, 단념이 있었고, 이 끔찍한 굴레가 끊어질 기미는 지금도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앞이 막막할 뿐이니 다시 막연함에 기대는 수밖에 방도가 없다.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새 인생의 시작이니 뭐니 하는 순진무구한 꿈이 아니라, 제발 나 숨만이라도 좀 쉬고 살자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기심에서 말이다.
이번만큼은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대답 없는 기도에, 보답 없는 믿음에 나는 내가 더 질기게 버티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당신이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 새해 소원이다.
닿을지 모르겠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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