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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근수 Apr 24. 2024

나는 누구였을까? 누구일까? 누구여야 하는가?


삶의 의미를 찾는 것(meaning seeking)은 이미 존재하지만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그 무엇을 찾는 것(meaning finding)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meaning making)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우리가 삶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나(삶)는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반지에게 ‘너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오히려 반지가 우리에게 ‘나(반지)는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산 반지는 그냥 물건이다. 하지만 그 반지를 나누어 낀 연인에게는 반지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고독의 얼굴


내가 나를 증명하려면 이력서를 내야 했다.

그대 정면에서 보여주는 무기력한 표정,

고양이의 몸짓, 각질이 된 분노,

진면목(眞面目)으로도

‘나’를 증명할 수 없었다.


이제 이력서의 나를 지우는 시간,

비로소 내가 보인다.

아침이면 머문 자리를 지워서

허공이 되는 달과 별,

노을 너머 제 홀로 깊어 가는 어둠,

오오, 저무는 삼라만상의 맑고 푸른 그늘이

우주의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


처음의 진면목이 안에서 떠오른다.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빛처럼

뼈대만 남은 나의 얼굴이 보인다.

고독의 자화상이

내 안의 백지에 서서히 그려진다.


구석본 


새로 사진을 찍어 그 얼굴을 보면 주름과 표정 속에는 삶의 무늬가 스며있다. 반면 오래전 주민등록증의 사진 얼굴을 보면 친숙하지만 낯설다.…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드러낸다. 이름, 학력, 이력 등이 닮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명함 등을 내민다. 하지만 그 속에 드러난 무기력한 표정, 각질이 된 분노와 진면목으로도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의 허구이며, 망상이었다는 것을 의식하고 인정하여야 나의 진면목을 마주할 수 있고, 나의 삶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릴 수 있다. 이제 이력서와 명함의 나를 지우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내가 보인다(문화저널21, 2024.4.22. 서대선 시인 글 편집).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 뇌 과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그레고리 번스(Gregory S. Berns)는 말한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누구’를 단수로 인식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현재의 나’, ‘과거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가 있다. 인간(의 뇌)은 자신이 겪은 수많은 경험으로 점철된 삶의 기억을 인식하고, 압축시키고, 예측하고, 해리하는 과정을 통해 생성된 이야기를 엮어 서사를 만들고, 자신만의 자아정체성(ego identity)을 형성한다. ‘나는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 한다.’ 자아라는 것이 뇌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총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고전을 통해 과거를 만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현재를 읽고, 보고, 들으며, 행동하는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구조를 구성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활용해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 과거 기억과 새롭게 구성된 현재의 이야기를 통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때, ‘내 안의 백지’ 위에 새로운 나의 모습을 재창조할 수 있다(문화저널21, 2024.4.22. 서대선 시인 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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