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노벨문학상과 고대 인류의 잔혹함
기원전 7천~기원전 2천경 신석기시대에는 부족들 사이에 최대 20~30명 수준의 소규모 분쟁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농업과 함께 시작된 인류는 잉여에 대한 소유권, 권력과 국가가 생기면서 폭력의 규모가 커졌다. 인간에 의한 인간 폭력이나 ‘작은’ 전쟁은 구석기시대에도 흔한 일이었지만 농업으로 경제적 잉여가 발생하기 시작한 신석기시대 후기부터는 폭력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소유뿐만 아니라 종교, 인종, 이념의 차이로 대량학살이 발생했다. 이중에서 종교로 인한 학살은 역사 내내 지속되었다. 2023년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겉으로는 영토분쟁이지만 그 배경에 종교가 있다.
산업혁명 이전 인류는 절대빈곤 즉 ‘맬서스 함정’에 빠져 있었기에 인구증가를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산업혁명 시기 토마스 맬서스(1766~1834)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에 인류는 멸망한다.’라고 주장했다. 농업사회는 결국 ‘맬서스 함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구 증가로 생존의 위기를 겪게 되면 주변의 농업사회나 수렵·채집 사회의 자원(토지와 식량)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데 이는 결코 무리한 상상이 아니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최초로 잉여식량과 함께 빼앗거나 지킬 가치가 있는 부를 산출해냈기 때문이다.
신석기 농업혁명과 더불어 발생한 잉여은 서로 뺏고 뺏기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청동기시대에 전쟁이 많았음은 유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유적인 충남 부여 송국리의 취락유적은 주변에 하천이 흐르는 높이 30미터 전후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석기시대 취락과는 달리 여러 채의 움집을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농기구 외에 청동이나 돌로 된 칼, 돌도끼, 화살 등의 무기가 함께 출토되고 있으며 화재로 불 탄 흔적도 발견되어 전쟁이 빈번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더욱이 이러한 군사적 경쟁을 통해서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국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전쟁이라고 할 만한 충돌은 기원전 2천~기원전 800년경인 청동기시대에 처음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신석기시대에 부족 간 최소 수백 명이 수개월 이상 살상을 벌인 대규모 전쟁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1천 년 이상 이른 기원전 3천 년경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대규모 매장지가 발견됐다. 이 매장지와 다른 유적지에서 발견된 화살촉과 두개골 부상 등 폭력 증거들은 당시 이 지역 공동체들 사이에 상시적이고 조직적인 충돌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유럽에서 대규모 전쟁 행위가 알려진 것보다 1천 년 이상 이른 후기 신석기 시대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1970년대 영국 남서부 차터하우스 워런(Charterhouse Warren)의 영국 동기시대(기원전 2450~2200)와 초기청동기시대(기원전 2200~1600/1500) 유적지에서 3천개가 넘는 사람 뼛조각이 발견되었다. 최소 37명의 것으로 추정됐지만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본다. 연구결과 이들은 기습적으로 학살되어 동물처럼 도살되고 일부는 먹혔을 가능성이 크다. 유적지에서 사람 뼈와 함께 소뼈가 많이 발견되어 식량은 풍부했을 것으로 보여 먹기 위해 이들을 죽였을 가능성은 낮다. 사회적 갈등으로 학살한 다음 이들을 비인간화(dehumanizing)하고 타자화하(othering)는 수단으로 도살하고 먹었을 가능성이 있다. 비인간화는 인간 이하 또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며 타자화는 사람들 간의 차이를 이용해 상대에 대한 공감을 줄이는 것으로, 차별, 박해, 폭력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 반인간이고 차별적으로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광주와 제주에서의 학살도 여기에 해당한다. 한강이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배경이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 유적지에는 절도나 모욕 같은 사회적 사건으로 인한 갈등이 폭력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선사시대에도 폭력이 난무했고 인간은 잔혹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