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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 Feb 21. 2024

점심을 먹다 저녁도 함께 먹는다는 건...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Ch0-Ep2

조숙한 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내게 '남성'은 그렇게 편한 존재는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는 남자인 친구들은 경쟁상대였고, 중학생 때는 그리 편하게 장난을 치며 놀기에는 뭔가 모를 다름이 느껴지는 대상이었고, 고등학생 때는 학교 제도상 남녀분반을 하여 더욱 멀리해야 할 존재였다. 성격이 소심하거나 혹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 못하거나 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나는 뭔가 모르게 또래 남자애들이 조금 불편했다. 아마 남녀관계에 있어 내외를 하는 편이었던 것 같다.



스무 살, 대학을 들어와서는 내게 남자는 2종류로 구분이 되었다.

연애상대와 비연애상대.


연애상대는 연애를 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존재들(외모가 취향이었거나, 성격이 멋있었거나 두 부류였던 것 같다)이었고, 비연애상대는 전혀 연애 감정이 들지 않는 상대들(친구, 팀원, 지인, 타인으로 지냈었다)이었다. 번외지만 누군가 내게 '이 사람과 연애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과 키스하는 상상을 해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기준이 어느 정도 맞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연애상대든 비연애상대는 내 주변에 있는 남자들과 나는 대화가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전공 특성상 남녀 비율이 거의 5:5 아니면 6:4였음에도 말이다. 당시 그 사실이 내게는 퍽 충격이었다.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나는 학교에서 보내주는 단기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선발이 되었다. 미국대학으로 보내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학교에서 선발된 인원은 총 14명이었고, 그중에 남학생은 5명이었다. 출국 며칠 전 우리는 학교 근처에서 사전 미팅을 하며 저녁도 먹고 술도 한잔 했었는데, 그 5명 모두 내게는 비연애상대였다. 당시 연애상대가 없으니 별다른 긴장감 없이 친목도모를 하며 편안하게 미국 생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좋아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각자의 어학 능력에 따라 반을 배정받기 위해 레벨테스트를 치렀다. 나는 꽤 영어에 자신이 있는 편이었기에 같이 간 멤버들 중 가장 좋은 레벨이 나올 것이라고 은근 자신을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잘 봤냐고 물으면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테스트 결과 발표날, 내가 1등이 아닌 2등인 것이 아닌가! 나보다 더 좋은 레벨의 등급을 받은 사람의 이름은 바로 Dan. 테스트를 치고 하나도 모르겠더라며 망한 것 같다고 천진난만하게 웃던 그가 나보다 듣기/말하기, 읽기/쓰기는 한 단계씩 더 높은 레벨이었고, 문법은 심지어 나랑 같은 레벨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결과에 무덤덤한 그가 조금은 미웠다. 질투가 났던 것 같다. 우습게도 그 질투의 감정이 바로 그에게 내가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Dan은 레벨이 꽤 높은 편이라 그가 듣는 클래스에는 우리와 함께 온 멤버들은 없었고, 심지어 한국 학생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문법 레벨이 나와 같아 그는 대부분의 일상을 나와 함께 하게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같이 밥을 먹고, 장을 보러 가고, 여행 계획을 짜고, 헬스센터를 다녔고, 그 일상 속에서 우리는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편안함 그리고 신기함'이었다.


그는 나의 말을 잘 들어주는 잔잔한 청취자였고,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그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말하는 똑똑한 대담자였다.


수업을 마치고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한두 시간이 훅 지나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다. 술 없이 1시간 이상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한 남성들만 만나다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남자사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원하는 옷을 찾으러 백화점을 몇 바퀴째 돌다 나에게 딱 맞는 내가 원하는 옷을 찾은 것 같은, 그런 유레카적인 느낌이었다.




하루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Dan과 함께 내가 지내고 있는 기숙사 밑에 있는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뷔페식이라 각자 원하는 음식을 덜어와 앉으며 평소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워낙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했던 터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느새 주위를 둘러보니 옆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우리가 덜어온 음식과 다른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어라? 저런 음식도 있었나? 왜 못 봤지?'라고 생각을 하며 무심코 시계를 봤다. 시곗바늘은 이미 오후 5시가 훌쩍 넘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던 사이 카페테리아는 점심시간에서 저녁시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오빠, 잠깐만! 지금 저녁식사 시간인 것 같은데?"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고?"


그는 나와 그의 핸드폰 시계를 번갈아 쳐다보며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고, 이내 그럼 저녁을 먹자며 접시를 바꿔 들고 메뉴를 담으러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자연스레 저녁 식사 메뉴를 담아와 점심을 먹으며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 갔다. 그리고 그날, Dan은 나의 생에서 비연애상대가 연애상대로 변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함께 점심을 먹다 저녁을 먹으러 간 유일한 남성이었으니 말이다.


                                                                            추억의 카페테리아 식당                                        


추억의 카페테리아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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