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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RYU 호류 Oct 22. 2021

100년 전에는 없었고 100년 후에도 없을 것들

깊이 상처 받은 어느 날의 걷기

답답하고 상처 받은 순간이면, 낮이든 밤이든 집 주변에서 가장 넓은 대로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나온다. 넓고 푸른 공원을 배경으로 한 탁 트인 10차선 도로를 보고 있으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평소에 별로 차량도 많지 않은 곳이라 더 그렇다.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어느 겨울밤에는, 가장 두꺼운 옷들을 걸쳐 입고 목적지 없이 나가서 걷기도 한다. 집 밖으로 막 나왔을 때는 너무 추워서 으아아 하며 벌벌 떨다가도, 1분만 걷다 보면 금세 열기가 올라와 성큼성큼 발을 내게 되는, 마치 트라이톤이 토닉으로 진행되며 긴장이 해소되는 그 느낌이 좋다.


나의 생각과 방식을 인정받지 못하는 나날이 너무 답답하고 억울하다. 일부러 마음에 상처를 주려고 내게 그렇게 소리 지르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평소에도 너무 통하지 않는 대화가 그날 이후로 더는 가망이 없겠다는 것을 체감하고 이제 그 인간관계는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조금은 다른 의견을 꺼내면 바로 따가운 말투와 윽박지름을 듣는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어떠한 견해를 존중받는 경험이 참 중요한데, 그 앞에선 끝까지 말할 수 있던 적이 별로 없다. 꿈에서도 그런 상황들이 자꾸만 나온다. 말을 하고 싶은데 다 가로막고, 가위눌린 듯이 끙끙대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잠에서 깨곤 한다.




이 날도 다른 때와 비슷하게, 상처로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갔다.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도망쳐서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내 정서 상태와 달리 날씨는 꽤 좋아서, 저번에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봐 뒀던 어느 유적지를 향해 슬슬 걸어가 봤다. 걸어서 40분 정도는 걸리는데,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대상으로부터 잠시라도 빠져나와 있다는 해방감을 찾은 것이 중요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분(古墳)을 빙 둘러싼 산책로를 걸으며, 이곳의 중심에 웅장하게 뿌리내린 고분을 바라보았다. 이질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저 멀리의 아파트나 고층 건물을 배경으로, 한눈에 펼쳐진 공원과 하늘의 시원시원한 시야가 있었다. 내 마음도 저렇게 개운하고 맑아지면 좋겠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디어클라우드 '사라지지 말아요'를 들었다. 상처 받거나 괴로울 때 이들의 노래를 들으면 큰 위로가 된다. 누군가에게 공감받지 못하는 마음을, 오히려 노래가 공감해준다. 치유의 음색과 가사에 마음이 갑자기 울컥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Xz8kpKBIR28


무엇이 그댈 아프게 하고
무엇이 그댈 괴롭게 해서
아름다운 마음이 캄캄한 어둠이 되어
앞을 가리게 해



노래를 다 듣고서도, 마음에 계속해서 좀 더 도움이 될까 하여 마음 챙김 명상 가이드를 열었다. 뭘 들으면서 걸을까 하다가 '고민이 있을 때 걸으면서 하는 명상'이라는 제목의 음성을 골랐다. 늘 그렇듯이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되는 듯하고 편안해졌다. 이렇게 걸으면서 지난 시간의 깊은 상처가 서서히 증발되고 자연스럽게 없어지겠지 기대하면서.


걸으면서 내 주변에 있는 것을 쭉 둘러봅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은 100년 전에는 없었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100년 후에도 여기 없을 것들입니다.


가이드 음성을 들으며 차분한 마음으로 걷고 있다가, 이 부분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100년 전에는 없었던 것이라니?

난 지금 몇 천 년이 된 고분들이 있는 유적지에 와있는데?"


명상 가이드에서 나오는 말과, 내 앞의 풍경이 아예 반대되는 아이러니함! 그 순간 굉장히 재밌고 유쾌했다. 하필이면 내가 이 명상을 듣던 장소가 유적지라서 생겨난 우연의 흥미. 명상에서 나오는 말과 다르게, 내 눈앞의 이 삼국시대의 유적은 100년 전에도 있었고 별 일이 없다면 100년 후에도 있을 것이지만, 이 명상 가이드에서 말하는 결론은 이것이었다.


지금 하는 내 고민도 결국에는 사라질 것입니다.
이 지구 상에 왔다 간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100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고민을 하고 좌절하고 실망도 했지만,
그것들이 결코 영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고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며
이 길을 걸어봅니다.



나의 깊고 오래되고 지속적인 상처도, 곧 멈출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상처를 받고 있지만, 노래나 명상처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사하게도 위로와 치유를 얻는다는 것 또한 느끼고 있다. 더 이상 분노와 답답함에 휩싸여 걸으러 나가게 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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