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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mouth Oct 31. 2021

무작정 걷다 보면

나의 취준생 암울했던 그때의 기억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스스로 나태해졌다고 느껴지면 무작정 걷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대로 잠이 들기엔 괜히 공허하고, 그렇다고 이리저리 웹서핑을 해봐도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게임을 해도 재미가 느껴지지 않고, 더 이상 마우스 커서가 움직일 곳이 없이 바탕화면을 무의미한 쳇바퀴를 돌게 되었을 때 늦은 밤 컴퓨터 앞에 목적 없이 앉아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순간 무작정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걷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취준생 시절의 정의는 '무기력감'이었다.


구직사이트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내가 갈만한 회사가 보이진 않았다.

아무 회사라도 당장에 들어가서 눈칫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아무 회사들은 나를 뽑을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만히 있으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이력서에 한 글자라도 적어내려고 컴퓨터 앞에 앉지만, 그것도 잠시뿐 금세 의지가 약해지고, 인터넷을 이리저리 항해하다 보니 시계는 벌써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다.


'오늘 하루도 글러먹었어'


이런 내가 너무나 한심해서 자책하며 내일부터는 달라지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침대에 누워보지만 습관처럼 스마트폰이 손에 들려져 있다. 각종 커뮤니티의 새 글들을 정독하며, 더 이상 새로운 게시글도 읽을게 없어지면 안 쓰던 어플도 한 번씩 열어보고, 날씨부터, 카메라 필터까지 만지작 거리다 보면 새벽 3시가 되고 만다. 매일 해 뜰 무렵에 잠들었던 습관 때문에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억지로  잠에 청한다.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지만 눈은 감은채 잠이 들기를 기다리다 지쳐 잠에 든다.


모두가 분주한 아침 인지도 모르고, 모두 활동을 시작하고 나면 느지막이 눈을 뜬다.

11시다.

어제 잠들기 전에는 분명 9시에 일어나야겠다고 다짐했는데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처자고 말았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잔소리를 더 듣기 전에 대충 짐을 챙겨 도서관으로 향한다.

가방에는 어떤 책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더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의무감에 도서관 책상에 앉아있다 저녁식사 무렵쯤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 눈치를 좀 덜 볼 수 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도서관 앞 횡단보도

신호에 멈춰 선 채 길 건너 도서관을 바라보면 숨이 턱 막힌다.

신호가 끝나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걷는다.

서고 싶을 때 잠시 쉬고, 미리 어디에 가야 할지 걱정도 없이 무작정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도 없는 모습이 내 취준생 시절과 똑같지만

걷는 내내 마음은 왜 이리 편한 건지 모르겠다.

걷고 또 걷다가 그대로 3시간에 걸쳐 집으로 돌아왔다.

발바닥이 욱신거리고, 무릎은 아팠지만 머릿속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따뜻한 샤워를 마치고, 걱정 없는 깊은 잠에 빠졌다.

몸이 지쳐서인지 아니면 마음이 녹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다음 날 무작정 걷을 수 있는 곳을 찾아본다.

그리고 전 여친 현 아내에게 왜 가야 하는지 설명도 없이 지리산을 가겠다고 전했다.

그 후 며칠 뒤 우리는 무작정 짐을 싸고 무더운 한여름 지리산을 걸었다.

별다른 목적은 없었다. 그냥 며칠 전 무작정 걸었던 기억이 좋았다. 그렇게 머리에 수건 한 장을 올려 매고, 비가 내리면 내리는대로, 더우면 지리산 개울가에 발을 담가가면서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했다.

그리고 각자의 잡으로 돌아간 뒤 시간이 지나 다음 해 우리는 취직에 성공했다.


일상을 살다 보면 고민과 잡념 때문에 쉽사리 집중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가벼운 산책으로 머리를 식히기도 한다. 걷는다는 게 이럴 때 어떤 효과를 주는지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정신과 마음을 치유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차가 생긴 이후에는 그때 무작정 걸었던 기억만큼 걸을 일이 많이 없어졌다. 가끔씩 마음이 답답할 때에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제는 무작정 길을 나서기에는 책임져야 할 일들이 많기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지만 언젠가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그때처럼 아내와 무작정 길을 나서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때에도 지리산을 다시 한번 걷고 싶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10년이 지나 올해 아이와 함께 구례를 다시 왔을 때 감회가 정말 새로웠다.


https://youtu.be/wLh2hb2lp8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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