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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름 Jan 23. 2024

09 공부에 '의지'가 생긴 아이

대안학교에 다니는 일어나는 일

너흰 어떻게 하나하나가 다, 이렇게 예쁘니?…

“비누로 세수 했어? 양치는 한거야?”

“중간은 해야지. 누가 엄청 공부 잘하래? 나 좋으라고 그러니?”


AI인줄, 엄마의 잔소리.(내가 써 놓고도 읽으니, 너무 너무 듣기 싫은 말이었구나…) 아이는 귀를 틀어막을만큼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속이 뒤집힐만큼. 그렇게 우린 서로 마주보고 웃을 일 없이 봄과 여름을 지났다. 한숨, 또 한숨으로.  


’뭐가 그렇게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거지?’

‘별 일 없었던 것만 같은데.’ 


자꾸 멀어지는 아이를 붙잡으려 하던 난, ‘잔소리’라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잘못된 방법을 쓰고 있었고, 우린 이미 결론 난 연인같았다. 화가 나는 이유는 슬픔, 또 슬픔이었다. 단번에 뒤돌아버린 것 같은 그에 대한 서운함과 다시 붙잡고 싶은 간절한 마음. 그러나 한 움큼 잡은 줄 알았던 모래는 밀려 온 파도에 쓸려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끝이 나고 마는 걸까? 

아, 그러고 싶지 않아. 절대. 


대안학교를 가기 전, 우린 지독하게 싸웠다. 화가 잔뜩 난 나를 보던 남편은 ‘아이를 훈계하고 가르쳐야지, 왜 같이 싸우고 있냐고’ 나를 더 화나게 했다. ‘누가 몰라?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고.’라며 남편에게로 또 화는 옮겨 가고, 옆에 있던 둘째는 눈치만 늘어 다가와서는 ’엄마, 난 뭐 잘못한거 없지?‘라며 안기고… 견디기 힘든 엉망진창의 상황은 반복되면서 점점 인성 잃은 쌈닭이 되는 날 스스로 주체하지 못했다. 사춘기 엄마들은 다들 이러려니, 라고 위로하기엔 지금 시간과 아이를 포기해버리는 것 같았다. 


남편과 나는 큰 아이에게 나름 정성을 들였다고 생각했다. 독일 유학생활동안 아이와 늘상 도서관을 다니고, 숲을 산책하고 함께 놀며 대화하는 시간도 많았고, 아이는 지금까지 우리와 원만한,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의 꽤 괜찮은 사이를 유지해 왔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일반중학교로 옮기면서 갈등이 시작됐었는데, 그 중학생이라는 세계는 좀 달랐나보다.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도 마음도 상해가는 게 당연하니까. 



엄마, 내일 한시간 일찍 깨워주세요.
영단어도 외워야 하고, 수학숙제도 덜했어요.
믿기십니까? 저는 잠시 믿지 못했습니다ㅜㅜ


아이는 7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7시 30분에 나간다. 지하철 1번, 버스 1번을 타고 50분 정도 걸려 8시 20분쯤 학교에 도착한다. 이전 일반학교에 가던 시간보다 1시간이나 빨리 일어나 챙겨나가야 한다.(5분만… 더 자고 싶은 그 아침에 1시간 일찍이란…) 회사원과 비슷한 루틴의 생활이 6개월 정도 반복됐는데, 아이는 좀 피곤해 하면서도 깨우면 신기하게도 바로 일어난다. 학교가 가고 싶은 곳이 되면. 


그러다 아이가 한 시간 더 일찍 깨워달라고 한다. 덕분에 모든 식구에 6시 30분에 기상.(그 아침에 모닝빵생지를 구움) 원래 학교 가는 시간도 이른데 왜? 굳이? 물었더니 영단어 암기와 수학 숙제때문이라고 하는데(너무 자연스럽게 늘 그래왔던 것처럼) 순간 코 끝이 찡해서 말도 못했다. 이게 되는구나.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또 실천한다는 것. 


나와 남편이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공부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면 모를까. 그래서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공부를 잘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음… 들은체만체하는 아이를 보니, 또 인성이 와르르 무너지며 아이는 죄없는 어린 양으로 만들어 버렸던 과거. 


그 아이가 이제 스스로 일어나, 자신을 챙기고, 공부를 하려고 한다. 아이는 알게 되었다. 아이도 한 인간으로서 충분히 존중받는 학교, 기본적인 교과의 핵심들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고, 즐겁게 배울 수 있게 가르쳐주는 선생님들의 수업 속에 ‘공부도 재밌고 해볼만한 것’이란 것을. 


아이 속에 생긴 정갈하고 꼿꼿한  ’생의 의지‘라는 것이, 처음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지식의 갈망‘이 벅차서 이 아이의 남은 인생은 얼마나 멋질까? 하는 무한의 상상까지 이어진다. 이전의 나의 ‘화’와 ‘잔소리’는 우릴 더 나락으로 떨어뜨려 ‘의지’는 커녕 ‘살 소망’마저 망가뜨린 건 아닐까, 하는 자책. 더 길어졌다면 분명 모두를 망쳤을 것이다,라는 섬뜩함.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행복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는 것. 그분의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는 말씀처럼 나도 요즘 아이를 보는 것이 참 좋다. 그분의 마음을 조금, 아주 조금 알겠다. 


변화는 누구로부터의 강압이 아닌, 오직 그의 마음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생겨난 의지는 붉고 투명하고 뜨겁다. 이제, 진짜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시작점이다.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열중함, 마음을 빼앗김을 말한다... 교육적 발달에서 흥미가 가진 운동력의 가치는 아이들 저마다의 특별한 능력과 요구, 선호를 고찰하게 한다는 점이다."


존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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