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이 10년 정도 지나고, 책소비가 과소비라는 생각에 진짜 꼭 읽을 책만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도 또 못 읽은, 안 읽은 책들이 책상 위에 책장에 쌓이자 아예 책소비를 관뒀다.
'지적 허영심'은 옷이나 신발보다 더 무가치하다 싶었다. 쌓이는 책과 지식은 비례하지 않았고,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도 읽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넷플리스에서 3월 1일, 개봉하는 영화 ‘로기완’을 알게 됐다. 배우 송중기가 주연이라 파급효과가 클 것 같은데, 일단 톱스타인 그가 탈북민을 연기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배우라면 다양한 연기를 통해 자신의 영역을 더 확장시키고 싶어할테지만 ‘탈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원작부터 읽기로 했다.
창비에서 나온 조해진 작가의 ‘로기완을 만났다’
200페이지 좀 안되는 장편소설인데, 방송작가인 ‘나’가 로기완을 만나기 위해 벨기에의 브뤼쎌로 떠나고 그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이야기와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조해진 작가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좋았다. 최근 읽은 현대소설 중에 꽤나 잘 읽히는 편이었고, 영리한 묘사, 메마르다 촉촉해지는 문장들이 책을 손에 계속 쥐게 만들었다.(스티븐 킹은 계속 말한다. 제발 독자가 읽고 싶은 소설을 쓰라고…)
로기완이 만나게 되는 브로커, 씰비, 박, 고아원 원장, 그리고 라이카와 서술자인 ‘나’까지.
좋은 소설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더니 이 소설이 그랬다. 벨기에로 가서 난민을 신청하라는 브로커의 마지막 말이 없었다면, 노킹 헤븐스 도어의 음악이 흘러나올 때 씰비가 로에게 그 노래의 제목을 메모해주지 않았다면, 박의 끝없는 도움이 없었다면, 고아원 원장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사랑하는 라이카와 새로운 땅 영국이 없었다면 .
나와 윤주, 재이의 이야기가 오가는 부분들은 로의 이야기들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잘 보완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제각각 다른 사람들의 다른 사건을 이렇게 하나처럼 보듬을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야기는 역시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고…)
북에서 온 그를 본다. 눈이 내린다. 자유 속을 걷지만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를 사람으로 대해 줄 사람다운 사람은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지옥이 이곳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다 앞에서 머리를 박고 쓰러져야 천국의 문을 두드릴 특권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는 그 길에 멈춰 서 있고, 나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영화 ‘로기완’
라이카는 차를 준비하러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지금 내 앞에는 로기완이 앉아 있다. 살아 있고, 살아야 하며, 결국엔 살아남게 될 하나의 고유한 인생. 절대적인 존재, 숨 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