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설렘 엔 이유가 없다

by 인성미남

심장이 뛴다는 것. 그런 감각을 잊은 지 오래였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면 의사는 늘 말했다. "심장은 규칙적으로 잘 뛰고 있네요."

물론 의학적인 의미의 박동이야 멈춘 적이 없었겠지. 살아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생존의 증거가 아니다.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 어떤 풍경을 보았을 때, 괜히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

그런 건 다 젊은 날의 특권이라고, 오래전에 졸업해 버린 앨범 속 추억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나이 오십을 넘긴 남자의 심장은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 그저 혈압 오를 일에만 격렬하게 반응할 뿐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나의 하루는 평온했고, 달리 말하면 무채색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서툰 솜씨로 아침을 차려 먹고, 가끔은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


그 안에는 더 이상 가슴 떨리는 사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주책이다. 어울리지 않는다. 그 나이에 무슨.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은 말들로 감정의 동요를 미리부터 차단해 왔다.


그러다 그녀를 만났다.

동네 모퉁이에 새로 생긴 작은 책방의 주인이었다.


'시간이 머무는 책방' 간판 이름이 마음에 들어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섰던 날.

낡은 나무 바닥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종이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한 커피 향이 나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두꺼운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냥, 그뿐이었다. 평범한 인사. 낯선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괜히 서가를 둘러보는 척하며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책 속으로 조용히 빠져들었다.

작은 공간을 채우는 건 나지막이 흐르는 LP 음악 소리와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뿐.

어색했지만,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날 나는 무슨 책을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소설책 한 권을 들고 책방을 나섰다.

"안녕히 가세요."

문을 나서는 내 등 뒤로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별일 아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저녁, 문득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동그란 안경과 부드럽게 휘어지던 눈매 같은 것들이.

다음 날, 나는 또 그 책방 앞을 서성였다. 딱히 살 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제 산 책은 첫 장도 넘기지 않았는데.

들어가야 할 이유를 한참이나 찾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어깨는 축 처져 있고 주름은 깊어진, 영락없는 중년의 사내.

'이 나이에, 내가 지금 뭘 하는 건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책이다. 스스로에게 내뱉고는 황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정신 차리자. 잊어버리자.

하지만 마음이라는 녀석은 주인의 말을 순순히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지 말라고 할수록 더 또렷해지는 법이더라.

그 며칠 뒤, 나는 결국 다시 책방에 갔다. 이번에는 핑곗거리를 만들었다. 지난번에 산 책이 재미없어서 바꿀 수 있느냐고 물어봐야지. 물론 거짓말이다.

"어머, 오셨네요."

그녀가 나를 알아봤다. 괜히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

나는 준비해 간 말을 더듬더듬 내뱉었다. 그녀는 곤란한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다른 책으로 둘러보세요. 천천히요."

그녀가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서비스예요. 날이 춥죠?"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가슴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날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눴다.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이 동네에는 언제 이사 왔는지, LP로 듣는 음악은 왜 좋은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도 그렇게 대화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우리의 대화는 늘 아이들 안부나, 공과금 이야기 같은 '생활'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책방을 나서는데 그녀가 말했다. "다음에 또 오세요. 그때는 손님 취향에 맞는 책을 제가 골라놔 볼게요."

그 말 한마디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나의 취향. 내 취향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뒤척이다가, 아주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낡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젊은 날의 전처와 주고받았던 연애편지들이 들어있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당신에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구에 실없는 웃음이 났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밤을 새워 편지를 쓰던 스무 살의 나. 그녀의 답장을 기다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우체통을 들여다보던 나. 그때의 나는 온몸이 심장이었던 것처럼 뜨거웠다.

그 뜨거움은 어디로 갔을까. 세월이라는 재 속에 묻혀 다 식어버린 걸까.

아니다. 아니었다.

책방 여자를 생각할 때 조금씩 빨라지던 내 심장 박동이 그 증거였다.

뜨거움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저, 아주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을 뿐.

나는 내가 느끼는 이 낯선 감정이 두려웠다. 평온했던 내 일상을 뒤흔드는 불청객 같았다.

며칠을 고민했다. 책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다시 무채색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그런데 이상했다. 모든 것이 전보다 더 지루하게 느껴졌다. 커피는 썼고, 음악은 소음 같았다.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 낯선 감정은 불청객이 아니었다.

오히려, 메마른 내 일상에 찾아온 아주 귀한 손님이었다.

얼어붙었던 강이 녹을 때,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은 얼음 깨지는 소리다. 평온을 깨는 파열음이다.

내 마음속에서 들려오던 소리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겨우내 얼었던 감정이 녹아내리며 들려오는 해빙의 소리.

나는 이 감정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어디론가 밀어내지도 않기로 했다. 그냥, 가만히 느껴보기로 했다.

이 설렘이 어떤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건 그저, 내 삶이라는 정거장에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 바람 덕분에 내 마음에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올 수 있다면.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 문장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사랑은 늙지 않는다. 사랑을 담는 그릇인 우리의 몸이 늙어갈 뿐.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본질은 스무 살 때나, 쉰 살 때나 똑같이 뜨겁고, 똑같이 설레고, 똑같이 사람을 잠 못 들게 한다.

나는 더 이상 책방에 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가서 책을 사고, 그녀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고,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잊고 있던 시의 구절을 배우고, 그녀는 나에게서 오래된 팝송의 제목을 알아간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굳이 정의 내리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다. 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는 것.

누군가를 생각하며 아침에 눈을 뜨고, 내일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의 무채색 세상은 다시 총천연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사랑은, 사랑은 정말 나이를 먹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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