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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Jan 11. 2024

생이라는, 기억과 망각의 춤사위

2024년 1월 11일, 맑고 맑은 바람, 0도~6도

만약, 내 생의 갖은 장면들을 담아낸 필름이 영사된다면, 나는 차마 그 영상을 똑바로, 끝까지 바라보지 못할 게다. 서툴고 조악했던 삶의 순간들이 부끄러워, 아마도 난, 이렇게 탄식할지도 모르지. ‘저 어리숙하고 못난 짐승이 나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삶의 기록은 상영되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내 머릿속에서조차 장편 대서사시로 기억되지는 않을 다.


기억으로부터 소환해 낼 수 있는 삶의 이야기는 파편화된 조각이라서, 그걸 이야기라고 정의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삶의 이야기라고 할 때, 나는, 깨진 유리조각 같은 장면들을 기워, 틈새를 메운다. 더욱 우스운 것은, 사실, 기억의 바다에서, 삶의 장면들을, 늘 내 의지대로, 내 마음대로 ‘소환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크고 작은 삶의 기후와 지형이 변화할 때마다, 기억의 바다에 풍랑이 일고 벼락이 내리 꽂힐 때마다, 때로 햇살이 비치고 은은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저, 갖가지 장면들이, 불현듯, 우연히, ‘발현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고는, 마치, 내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기억나?’


기억난다는 것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고, 더욱이 ‘사실 그 자체’도 아니어서, 만약 기억이 내게 ‘기억나?’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는 게 타당할 것 같다. 기억나. 하지만 그 기억에 대해 지금 무어라 의식해야 할지,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 사실의 재현으로서 내 생에 대한 영상이 있는 그대로 영사된다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될 테지만, 파편화된 기억은 지금의 의식이 이를 해석하고 수용할 여지를 준다. 또한, 어떤 기억은, 바닷속 깊은 곳에 수장된 채, 어마어마한 해일이 일어날 때조차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실은, 그래서, 그 덕분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다. 내 생이 날것 그대로 상영될 때, 나는,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 깊은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기억과 함께 영원히 묻히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피히테는 주체나 세계는 기억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지만, 자아가 세계를 비교적 굳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사실, 기억이 파편적이고 임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임의성은 양가적인 거라서, 기억의 콜라주를 기워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일이란, 자아를 살게 만들기도 하고, 죽게 만들기도 한다. 대개는 살기로 한다. 그건 아마도, 가능한 한 살아 있으려는 생의 속성으로 인해, 존재를 절멸로 이끄는 것이 마땅해 보이는 기억은 거의 즉각적으로 수장시켜 버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삶의 기쁜 순간들이든 슬픈 순간들이든, 아름다운 순간들이든 참혹한 순간들이든,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기억하려 한다. 피히테의 말처럼, 분명, 기억이 곧 현재의 의식을 구성하는 세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가 주장했듯, 망각이 창조와 생성의 근원이며,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많은 진실들이, 사실들이, 기억의 바다에 장된 덕에, 나는 현재를 의식하며, 임의적이고 파편화된 기억들을 뒤로한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과 망각의 기묘한 춤사위. 숨을 쉬는 한 계속될, 생의 땀내에 절은 춤사위. 문득, 캄캄한 그믐밤, 기억의 바다 앞에서, 생의 모래사장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존재로,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고 싶어진다.




2015년 1월 11일 아침 6시경, 형이 죽어버린 사건을 기억하다가, 망각이 불러낸 기억과 춤을 추다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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