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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Jan 26. 2024

밥, 생의 살점이 에여 있는,

하지만 단맛이 나는,

씨름판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를 봤는데, 대를 이어 장사에 등극한 가족의 밥상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좀 보태서 말하자면, ‘세숫대야’만 한 대접에 고봉밥을 담아 먹고 있는 거였다. 이채롭고 신기해서 주목한 것은 아니다. 어디서 많이 본 밥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한겨울이면, 아랫목에 깔아 둔 솜이불 아래 고이 모셔져 있던, 젊은 날의 아버지 밥그릇과 닮아 있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취사 및 보온 기능을 갖춘 전기밥솥이 있고, 심지어는 전자레인지에 간단히 데워 먹는 즉석밥도 있지만, 내 어린 날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궁이에 불을 때 가마솥 밥을 지어 먹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때에도 그런 집이 드물지 않게 있었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는 그런 삶을 겪어볼 일이 없었다. 다만, 주거공간과 분리된 재래식 부엌에서 석유곤로에 얹은 냄비로 지은 밥과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에 대한 기억은 눈에 선하다. 어느 날엔가는, 어머니가 화염에 휩싸인 석유곤로를 양손에 쥔 채 부엌에서 뛰어나오는 걸 목격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곤로 주유구 근처에 흐른 기름에 불이 옮겨 붙은 모양이었다. 어린 내게는, 그런 일이야말로, 어른의 위대함에 대한 존경을 자아내는 사건이었다. 생각해 보라. 화마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인! 물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하지만, 그때 나는, 어른도 불은 무서워하며, 어머니는 그저 놀라 황급한 마음에 앞뒤 잴 것 없이 뻘겋게 타오르는 곤로를 들고 냅다 뛴 것뿐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짐승이었다.


언제나 갓 지은 밥은 맛있다. 미각의 편견 내지 각색된 기억 때문이겠지만, 곤로에 지은 냄비 밥은 최첨단 전기밥솥산 밥보다 맛있다. 물론, 곤로 시대의 밥에는 돌이 적잖이 섞여 있어, 와구와구 씹다가는 어금니가 부러질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외할머니의 환상적인 조리질로도 색출되지 못한 돌멩이를 하나쯤은 씹어야, 오늘도 밥 한 그릇을 먹었구나, 할 수 있었다. 어떤 날에는 입 안 가득 문 밥알과 뒤엉킨 돌멩이를 골라 뱉기 귀찮아서 그냥 꿀꺽 삼키기도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어른들, 특히 아버지의 긍정적인 부추김이 한몫을 했다. “괜찮아. 니들은 돌멩이를 씹어 먹어도 다 소화될 나이야. 안 죽어.” 아버지는 돌멩이뿐 아니라, 염장고등어구이의 뼈도 남김없이 씹어 먹으라고 주문했는데, 가끔 목구멍에 가시가 걸리면, 씹지 않은 맨밥을 삼켜 넣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밥의 찰기와 목구멍의 연동운동을 조합한 ‘밀어넣기’ 전략이었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발바닥이나 방바닥에 흘린 밥알이나 반찬부스러기는 당연히 주워 먹어야 했다. 발바닥에 붙은 밥알을 떼어 먹을 때마다, 우리는, 쌀 한 톨을 수확하기 위해 농부는 아흔아홉 번 발길을 옮긴다는, 아버지의 훈화를 듣곤 했다.


아버지의 밥그릇은 가족 구성원 그 누구의 밥그릇보다 컸다. 그런 까닭에, 집 안 어느 곳에서 만나더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밥그릇임을 알아채지 못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겨울 솜이불 아래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추위에 꽁꽁 언 발을 녹이려 발을 밀어넣었을 때, 덮개와 그릇이 약하게 부딪히며 내는 쇳소리만으로도, 우린 그것이 아버지의 밥그릇임을 알 수 있었다. 때로는, 언 손을 더 빨리 녹이고 싶어, 따뜻함을 넘어 뜨끈하기까지 했던 아버지의 밥그릇을 꼬옥 쥔 채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그때 우리가 어루만졌던 것은, 아버지의 밥그릇이었을까, 아버지의 마음이었을까,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었을까.


아버지는 고봉밥을, 정성 들여, 천천히 먹었다. 어른보다 먼저 밥숟가락을 들지도, 내려놓지도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밥을 먹을 때는 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아버지의 속도를 천천히 따라가며, 그이가 밥을 먹는 장엄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곤 했다. 그래, 장엄한 광경이었다. 오직 어른에게만 허락된, 거대한 고봉밥, 오직 어른에게만 허락된, 따뜻한 솜이불 밥솥. 하지만, 그건 남자어른에게만 허락된 금단의 영역이었으니, 밥이 법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밥이란 가부장의 법이라는 뜻이기도 해서, 우리는 말하자면, 아버지의 고봉밥에서 흘러넘친 밥알갱이들을 나누어 먹는 존재들과 같았다. 화염을 두려워하지 않던 여인이여, 물에 만 밥을 마시듯 삼켜 넣던 어머니여, 당신은 불에 데인 가슴을 식히려, 물에 젖은 밥을 삼켰는지요. 아버지의 고봉밥 언저리 어디에 당신의 밥그릇이 놓여 있었는지요.


고봉밥 먹던 아버지보다 훨씬 더 늙어버린 나는, 이제 그이의 밥그릇에 담겼던 쌀알의 반의 반도 못 먹어서, 실은 고봉밥 먹던 그이의 나이 때도 그렇게는 못 먹어서, 혹여 나는 어른의 밥을 먹지 못해 어른다운 어른이 되지 못한 건지 자문하다가, 대체 어른답다는 게 무엇이었어야 하는지 되물었다. 하지만, 실은, 잘 모르겠다. 다만, 불이 무서움에도 화염을 끌어안고 뛴 여자처럼, 화염을 구해 오기 위해 밥심을 욱여넣은 남자처럼, 어떻게든 살아내 왔던 것 같기는 하다. 어떻게든 살아낸다는 것이 어른답다는 것의 징표는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내려 한다. 어린 것이든, 젊은 것이든, 늙은 것이든. 때로는 죽음에 대한 갈구조차 생에 대한 욕망의 다른 이름인 경우도 있다. 산 자는 어떻든 살고 싶어 한다. 그러니, 기어이 살고자 하는 것만으로 어른이 될 수는 없었던 거다.


낡아가면서, 켜켜이 쌓이는 시간 속에서,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그 어떤 일도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수사가 아니라, 살을 에는 현실로, 그것도 되풀이해서 경험할 때, 그 경험으로 에인 살점이 고봉밥 수천 그릇을 채울 만큼 쌓일 때, 우리는 그런 삶의 실제를 비교적 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순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마음이 순해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런 것이 삶임을, 삶이란 애초에 그런 것임을,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는 얘기다. 인정과 수용에는, 알겠지만, 상실과 슬픔과 고통이 따른다. 어쩌면, 낡아가면서, 아니 기어이 낡아가야 배울 수 있는 것들 속에, 어른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더라’는, 어른의 시기를 관통하며, 점차 낡아가며, 늙어가며 알게 되는 숱한 이야기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어른다움의 지표가 되어줄 것만 같은 것들, 예를 들어, 지혜, 관용, 성숙, 통찰, 기타 등등, 듣기만 해도 그럴싸한 무엇이 담겨 있으면 좋으련만, 나이 쉰이 넘어서도, 내게 그런 덕목들이 싹터 자라왔는지, 그래서 이제는 타인에게, 다른 존재에게, 다음 세대에게 넉넉히 품을 내어줄 만한 존재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게서 그런 어른다움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였는지, 괜찮은 어른이었는지, 난 잘 모르겠다. 다만, 낡고 닳아 생을 망각하기까지, 그이가 비운 고봉밥만큼이나 많은 생의 살점이 에여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였으리라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노년에 이른 아버지와 밥상머리를 마주하며 앉았던 어느 날, 바닥에 떨어뜨린 밥풀을 주워 먹는 내게 그이는 말했다. 주워 먹지 말라고, 그건 그저 먹을 게 부족하던 옛이야기일 뿐이라고. 여전히 밥은 법이지만, 이제 밥은 가부장의 법이 아니라서, 게다가 생을 먹이는 일로 치자면, 먹을 게 부족한 건 여전한 일이라서, 나는 그이의 말을 흘려들은 채, 가만히 밥알을 주워 먹었다. 밥알을 씹다 보니, 거기에서, 오랜 세월 쌓여온 상실과 슬픔과 고통이 찐득하게 터져 나왔다.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밥알 하나조차 기어이 삼켜 넣는 게 삶이었고, 거기서 상실과 슬픔과 고통이 배어 나오는 것이 삶이었고, 그럼에도 그 밥알 하나 으깨어 물 적에 단맛조차 나는 것이 삶이었다. 밥이 법일 수 있었던 건, 고통의 밥에서 단맛이 나기 때문이었다. 상실과 슬픔과 고통이 수반되는, 삶의 인정과 수용의 이야기 속에, 결국 밥이 있었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나. 어른 되기가 어려운 까닭이, 고작 밥숟가락 하나 때문이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나. 나는 알고 있었느냐고?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진즉, 알아차린 줄만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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