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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Feb 23. 2024

목이 꺾인 새에게, 날아오르지 못한 삶에게,

2024년 2월 24일, 며칠째 끈질기게 내리는 눈, 영하 4도~1도

눈을 치우러 나가며 가게 앞문을 열어둔 내 잘못이다. 변명하자면, 혹 가게 뒷문으로 들어온 손님이 나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자그마한 박새 하나가 날아들었다. 잠시 상품 매대 위에 앉아 두리번거리던 녀석은 이내 불안정한 날갯짓을 하며 날아갈 길을 찾았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지만, 이리로 나가렴, 하며 길안내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존재가 오히려 녀석을 불안하게 만들 터였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로 한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박새는, 곧,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커다란 유리창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집 앞마당에서 창문에 부딪힌 새 한 마리가 그렇게 추락했다가 곧 의식을 회복해 날아간 일이 있었다. 그렇기에, 난 그 작은 녀석이 잠시 기절한 거라 믿고 싶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는데도 기척이 없어, 자그마한 몸을 조심스럽게 문지른다. 일어나라고. 정신 차리라고. 얼굴이 움직이는 듯하다. 살아 있나? 의식이 돌아왔나? 허나, 녀석의 고개가 맥없이 옆으로 고꾸라진다. 내 손놀림으로 인해 이 움직인 것일 뿐, 박새는 목이 부러진 채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그 아이를, 말 그대로, 너무 작은 그 아이를 가만히 들어 두 손바닥 위에 올린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날아갈 세상을 찾던 목숨, 아직 차갑게 식지도 않은, 뻣뻣하게 굳어버리지도 않은 몸뚱어리. 눈물이 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너는 봄나무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너는 여름하늘을 날아 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사철나무 옆 눈밭을 파헤치고, 황톳빛 흙을 파내고, 묻는다. 흙이 떨어질 때마다, 너의 마지막 목소리, 누구를 찾는지 갈급하게 지저귀던 너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부디, 잘 가렴. 지상의 육신은 닿지 못할, 거기 어드메서, 훨훨 날아다니렴.


한껏 날아보지도 못한 채, 고꾸라진 삶들을 생각한다. 저기 눈앞에 세상이 있다고 믿으며, 날갯짓하다가, 목이 꺾인 삶들을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실은 감지하지 못한, 장벽이 있어서, 무작정 날아오르려 하다가는, 세차게 튕겨져 나오며, 영혼이 부러져 버린다는 걸, 미처 알지 못한 삶들을 생각한다. 날고 싶지만 날지 못하는 생을 목격하면서도, 난, 울지 못했다. 나는, 애초부터  수 없는 새였으므로, 나의 날개는 퇴화기관이므로, 그리하여, 인식하지 못할 장벽 너머로, 날갯짓할 욕망조차 품어본 적 없으므로.


박새의 목이 꺾인, 유리창에, 깃털이 묻어 있었다. 얼마나 세상 밖으로, 아니 세상 안으로, 날아오르고 싶었는지, 투명한 장벽에, 제 몸을, 영혼을 새겨 넣은 거였다. 차마, 떼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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