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에 녹이 슬었다. 모를 뻔 했는데 삶은 계란을 꺼내려고 뚜껑을 열어 안쪽을 보니까 바닥 이음새가 갈색으로 변해있다.
“언제 이렇게 됐지? 입구가 좁아서 안이 이런 줄도 몰랐네. 우리 여기다 물 끓여 먹은 거야?”
“당장 버리고 하나 사!”
어머님은 새마을금고나 교회에서 받아온 사은품들을 안 쓰고 아껴 두셨다가 며느리한테 주신다. 그렇게 받아온 아이들 중에 아담해서 좋다 싶던 냄비는 찌개를 끓이다 말고 갑자기 퍽 하면서 손잡이 나사 하나를 뱉어냈다. 덩치만 크지 가뿐했던 찜솥은 채망이 솥 안에 꽉 껴서 다시는 안 나왔다. 그에 비하면 주전자는 꽤 오래 쓴 셈이다.
“정말 사야겠지?”
나는 주전자를 새로 장만할 일이 반갑기보다 피곤해서 남편한테 묻는다.
“어떤 걸로 사지?”
“아무거나 사면 되지!”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아무거나가 아니라는 건 정말 아무거나 시켰다가 허구한 날 잔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이거 진짜 별로다. 물건을 왜 이렇게 생각 없이 만들까?”
남편은 매번 처음인 것처럼 투덜댄다. 나는 그게 꼭 그 물건을 고른 나한테 하는 말 같아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어진다.
크든 작든 비싸든 싸든 상관 없이 같이 쓸 물건을 고르는 일은 스트레스다. 그래도 남편한테 맡길 수는 없다. 나의 선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남편보다 남편의 선택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 나를 더 못 참는다.
‘음… 한번 살 때 제대로 사자고. 싼 거 사서 계속 바꾸는 것보다 좋은 거 하나 사서 애지중지 오래 쓰는 거야. 그게 현명한 거지. 쓰레기도 줄이고 말야. 그러면 휘슬러부터 한번 볼까? 휘슬러하면 솔라 패턴이지. 그 패턴 들어간 주전자가 이젠 안 나온다고? 아쉽네. 그럼, 르크루제? 아, 법랑은 별론데. WMF로 가볼까? 뭐야? 디자인이 너무 모던하잖아. 우리집 부엌에는 안 맞아. 알레시? 이건 주전자가 아니라 완전 오브젠대. 마땅한 주전자가 이렇게 없다고? 아! 일본 브랜드들이 있었지. 아이자와, 소리야나기. 드럽게 비싸네. 맘에 쏙 들지도 않는데 무슨 주전자 하나 값이…’
모니터에 창이 10개쯤 떠있는데도 사은품 주전자를 대신할 녀석 하나가 없다.
‘그냥 없이 살까? 없어도 되잖아? 가끔 믹스 커피 타 먹을 때나 계란 한 두 개 삶을 때 빼고는 뭐 쓸 데 있어? 아니지. 그래도 없으면 아쉽지. 그래, 눈높이를 낮추자. 사람이 타협할 줄 알아야지. 리빙센스, 퀸센스. 러빙홈. 좋아, 들어가보자.’
생각보다 예쁜 디자인이 많아서 스물 다섯 개쯤 창을 띄우고 나서야 2개로 압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격도 디자인도 비스무리해서 마지막으로 유광이냐 무광이냐만 선택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하나는 1.2리터고 하나는 2리터다.
남편한테 급하게 카톡을 보냈다.
“우리 쓰던 거 혹시 몇 리터인지 알아? 어제 재활용 쓰레기로 버렸는데 어떡하지? 그게 쓰기 딱 좋은 크기였는데”
“내가 전에 물 넣고 정확히 재본 적 있거든. 1.5리터야. 비슷한 걸로 사면 돼.”
“어? 1.2도 아니고 2도 아니고 1.5리터라고?
“1.5리터야. 정확히.”
하필 1.5리터라니. 내가 골라 둔 두 개는 모두 아웃인 건가. 물건 살 때 리뷰를 잘 안보는 스타일이지만 이번에는 타인의 조언이 절실했다.
1.2리터 주전자:
“생각보다 작아서 받아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귀여워서 그냥 쓰려고요.”
“혼자서 차 끓여 먹는 용도로 주문한 건데 딱 좋아요.”
“너무 작아서 물을 조금만 많이 넣어도 금방 끓어 넘쳐요.”
2리터 주전자:
“디자인도 좋고 가벼운데 물이 다 안 빠져서 그게 흠이네요.”
“4인 가족 주전자로 넉넉하니 딱 좋아요.”
“입구가 넓어서 쓰기 편하겠어요. 잘 쓰겠습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느 쪽을 부각해 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주전자가 착한 주전자도 되고 나쁜 주전자도 되었다. 사람이나 주전자나.
창 두 개를 마저 닫고 우리집 부엌을 바라봤다. 가스렌지나 식탁 위, 전기 밥솥 옆, 설거지를 엎어 놓은 선반까지 주전자가 놓일 곳에 1.2리터와 2리터를 가만히 얹어봤다.
‘얘들아, 너희는 누가 더 좋을 거 같니?’
평생 같이 살 신랑을 고르냐, 수억 짜리 집을 고르냐, 결정 장애가 심각하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선택 앞에서 정말로 진지해진다.
주전자는, 조금 맘에 안 들어도 금세 써버리고 새로 살 수 있는 욕실용 화장지가 아니고, 길면 짧게 수선해 입을 수 있는 청바지나 내내 신발장에 박혀 있다가 1년에 한번쯤 나올까 말까 한 망치도 아니다. 매일 보고 자주 만지고 같이 이사 다니면서 같이 낡아진다. 그러니 성급하게 아무나 데려올 수 없다.
조금 더 이 부재를 느껴야겠다. 불편해도 냄비에 커피 물을 끓이고 계란을 삶으면서 주전자의 빈 자리가 새로 올 주전자의 크기는 얼마만 해야 알맞고, 어떤 모양이라야 좋은지 알려줄 때까지.
오래도록 함께 할 주전자를 기다리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