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young Nov 26. 2021

주전자 없는 밤

주전자에 녹이 슬었다. 모를 뻔 했는데 삶은 계란을 꺼내려고 뚜껑을 열어 안쪽을 보니까 바닥 이음새가 갈색으로 변해있다.  


“언제 이렇게 됐지? 입구가 좁아서 안이 이런 줄도 몰랐네. 우리 여기다 물 끓여 먹은 거야?”

“당장 버리고 하나 사!”


어머님은 새마을금고나 교회에서 받아온 사은품들을 안 쓰고 아껴 두셨다가 며느리한테 주신다. 그렇게 받아온 아이들 중에 아담해서 좋다 싶던 냄비는 찌개를 끓이다 말고 갑자기 퍽 하면서 손잡이 나사 하나를 뱉어냈다. 덩치만 크지 가뿐했던 찜솥은 채망이 솥 안에 꽉 껴서 다시는 안 나왔다. 그에 비하면 주전자는 꽤 오래 쓴 셈이다.


“정말 사야겠지?”

나는 주전자를 새로 장만할 일이 반갑기보다 피곤해서 남편한테 묻는다.

“어떤 걸로 사지?”

“아무거나 사면 되지!”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아무거나가 아니라는 건 정말 아무거나 시켰다가 허구한 날 잔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이거 진짜 별로다. 물건을 왜 이렇게 생각 없이 만들까?”

남편은 매번 처음인 것처럼 투덜댄다. 나는 그게 꼭 그 물건을 고른 나한테 하는 말 같아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어진다.   


크든 작든 비싸든 싸든 상관 없이 같이 쓸 물건을 고르는 일은 스트레스다. 그래도 남편한테 맡길 수는 없다. 나의 선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남편보다 남편의 선택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 나를 더 못 참는다.


한번   제대로 사자고.   사서 계속 바꾸는 것보다 좋은  하나 사서 애지중지 오래 쓰는 거야. 그게 현명한 거지. 쓰레기도 줄이고 말야. 그러면 휘슬러부터 한번 볼까? 휘슬러하면 솔라 패턴이지.  패턴 들어간 주전자가 이젠  나온다고? 아쉽네. 그럼, 크루제? , 법랑은 별론데. WMF 가볼까? 뭐야? 디자인이 너무 모던하잖아. 우리집 부엌에는  맞아. 알레시? 이건 주전자가 아니라 완전 오브젠대. 마땅한 주전자가 이렇게 없다고? ! 일본 브랜드들이 있었지. 아이자와, 소리야나기. 드럽게 비싸네. 맘에  들지도 않는데 무슨 주전자 하나 값이…’


모니터에 창이 10개쯤 떠있는데도 사은품 주전자를 대신할 녀석 하나가 없다.   


‘그냥 없이 살까? 없어도 되잖아? 가끔 믹스 커피 타 먹을 때나 계란 한 두 개 삶을 때 빼고는 뭐 쓸 데 있어? 아니지. 그래도 없으면 아쉽지. 그래, 눈높이를 낮추자. 사람이 타협할 줄 알아야지. 리빙센스, 퀸센스. 러빙홈. 좋아, 들어가보자.’


생각보다 예쁜 디자인이 많아서 스물 다섯 개쯤 창을 띄우고 나서야 2개로 압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격도 디자인도 비스무리해서 마지막으로 유광이냐 무광이냐만 선택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하나는 1.2리터고 하나는 2리터다.


남편한테 급하게 카톡을 보냈다.

“우리 쓰던 거 혹시 몇 리터인지 알아? 어제 재활용 쓰레기로 버렸는데 어떡하지? 그게 쓰기 딱 좋은 크기였는데”

“내가 전에 물 넣고 정확히 재본 적 있거든. 1.5리터야. 비슷한 걸로 사면 돼.”

“어? 1.2도 아니고 2도 아니고 1.5리터라고?

“1.5리터야. 정확히.”


하필 1.5리터라니. 내가 골라 둔 두 개는 모두 아웃인 건가. 물건 살 때 리뷰를 잘 안보는 스타일이지만 이번에는 타인의 조언이 절실했다.   


1.2리터 주전자:

“생각보다 작아서 받아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귀여워서 그냥 쓰려고요.”

“혼자서 차 끓여 먹는 용도로 주문한 건데 딱 좋아요.”

“너무 작아서 물을 조금만 많이 넣어도 금방 끓어 넘쳐요.”


2리터 주전자:

“디자인도 좋고 가벼운데 물이 다 안 빠져서 그게 흠이네요.”

“4인 가족 주전자로 넉넉하니 딱 좋아요.”

“입구가 넓어서 쓰기 편하겠어요. 잘 쓰겠습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느 쪽을 부각해 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주전자가 착한 주전자도 되고 나쁜 주전자도 되었다. 사람이나 주전자나.


창 두 개를 마저 닫고 우리집 부엌을 바라봤다. 가스렌지나 식탁 위, 전기 밥솥 옆, 설거지를 엎어 놓은 선반까지 주전자가 놓일 곳에 1.2리터와 2리터를 가만히 얹어봤다.


‘얘들아, 너희는 누가 더 좋을 거 같니?’


평생 같이 살 신랑을 고르냐, 수억 짜리 집을 고르냐, 결정 장애가 심각하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선택 앞에서 정말로 진지해진다.


주전자는, 조금 맘에  들어도 써버리고 새로   있는 욕실용  화장지가 아니고, 길면 짧게 수선해 입을  있는 청바지나 내내 신발장에 박혀 있다가 1년에 한번쯤 나올까 말까  망치도 아니다. 매일 보고 자주 만지고 같이 이사 다니면서 같이 낡아진다. 그러니 성급하게 아무나 데려올  없다.  


조금   부재를 느껴야겠다. 불편해도 냄비에 커피 물을 끓이고 계란을 삶으면서 주전자의  자리가 새로  주전자의 크기는 얼마만 해야 알맞고, 어떤 모양이라야 좋은지 알려줄 때까지.


오래도록 함께  주전자를 기다리는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무언의 답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