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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young Dec 01. 2021

아직도 부반장


부반장.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 친구들이 있다.

“너 참 이쁘고 똑똑했어. 학창시절에 그렇게 많은 부반장들이 있었지만 부반장하면 너밖에 생각 안 난다니까.”


그 감투와 함께 자동 소환되는 아픔이 있는지는 모르고 초등학교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나를 추켜세운다.

“그만 쫌 해라. 대체 언제적 부반장이냐.”

나는 싫은 게 아니라 지겨울 뿐이라는 듯이 말한다.

부반장이라는 말에 콕 박힌 아픈 눈빛 하나는 숨기고서.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불과 1년 뒤면 급격히 살이 찌느라 종아리 뒤가 툭툭 터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게 나는 날씬하고 길쭉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소풍날 수건 돌리기를 하는 중이었던가, 잔 꽃무늬로 가득한 연녹색 남방에 워싱이 밝게 들어간 청바지를 입고, 거기에 긴 파마머리까지 흩날리며 잔디밭에 어여삐 넘어지는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해준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우리 반 누구랑 누가, 옆 반에 또 어떤 녀석이 너를 좋아한다더라, 서울에서 전학 온 남자애도 벌써 부반장을 안다더라. 매일 들려오는 소문으로 유치하지만 우쭐했다.   


좋아하면 그냥 선물이나 사다 바칠 것이지 학교 끝나고 꼭 집까지 쫓아오는 녀석들이 있었다. 몰래 따라오는 주제에 지들끼리 얼마나 키득거리는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네 집으로 목적지를 급하게 수정한다거나 문방구에 들어가서 한참을 안 나온다거나 선생님한테 이르겠다고 윽박지르는 방법으로 기어이 녀석들을 따돌렸다.


그런데 쌘 놈이 나타났다. 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 하기로 소문난 녀석이었다. 옆에 딱 붙은 똘마니들까지. 뭐라더라. 며칠 전에는 동네 중학교 형들이랑 붙었는데도 안 밀렸다든가.  


정말로 무섭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부반장의 파워를 제대로 보여줄 기회다 싶기도 했다. 나는 남자 아나운서처럼 반듯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우리 담임 선생님한테 이 일을 당당하게, 게다가 소상히 알렸다. 선생님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부모님까지 모셔 잘못을 따지고,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까지 받아내신 모양이었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과 결과를 피해자의 부모님께 직접 말씀드리기 위해 예고도 없이 부반장네 집 방문길에 오르신 거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즈음, 세상의 모든 사물이 다 짠하게 보이는 하필 그 시간에 칠이 다 벗겨져 녹이 슬 대로 슨 작은 대문 위로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여기가 부반장네 집이라구?’

높은 쪽마루 위에서 안방 문고리를 잡아당기다 말고, 우리 집 안을 들여다보는 그 눈빛과 마주하고 말았다.

‘선생님?’


선생님과 엄마 아빠는 비좁고 어둑한 우리 집 안방에 마주 앉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민망해 서로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면서.


방바닥 장판은 왜 그렇게 우글거렸는지, 벽에 걸린 수건이며 아빠의 츄리닝은 왜 그렇게 누랬는지, 어울리지도 않는 괘종시계는 왜 그렇게 터무니없이 컸는지, 엄마가 내온 음료수 컵은 왜 그렇게 초라했는지.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부반장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단정한 옷 매무새와 부풀린 자신감 뒤에 꽁꽁 숨겨왔던 비밀을 다 들켜버리고 말았으니 까.

‘내일부터 선생님 눈을 어떻게 쳐다보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날 그 시간 이후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진짜 애정에서 가짜 애정의 눈빛으로, 자기는 변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 쓰고 있는지는 쓰면서도 사실 잘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금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보다 더한 상처를 주고 받고 사는 것을. 다만, 그 눈빛에 힘들어하던 나의 눈빛을 알아봤을 그 때의 엄마에게 미안하다. 이젠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낼 수도 없는 나의 엄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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