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만남과 설렘의 도시
셋째 날은 자매결연을 한 메리맥 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고등학교. 우리 학교도 참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비하면 참 협소했다. 건물 두세 개가 연결된 듯 컸고, 여기저기에 강당과 농구장도 있었다. 특히 급식실이 놀라웠다. 조리기구는 보이지 않고 식판과 수저, 핫도그 등의 냉동식품이 전부였다.
어느 정도 학교를 둘러본 우린 시청각실에 모여 각 학교의 상징을 교환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스크린의 메리맥 문양을 찍으려 했는데 인사도 나눠본 적 없는 1반의 두 명이 브이를 짓고 있었다. 이 사진을 건네주었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날을 위해 한 달여 동안 준비한 조별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흩어졌다. 한국어 교육을 주제로 삼았던 것 같다. 자모 모형도 준비해서 각자의 이름을 한글로 쓰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아무튼 산발적으로 흩어진 우린 메리맥 학생들과 함께 준비한 수업을 진행했다. 우리 반의 어떤 조는 한복을 입고 진행했고, 또 누구는 농구장에서 진행했다. 우린 어느 교실의 어느 구석에서 진행했는데, 생각보다 덜 정돈된 현장 탓에 어영부영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이후 운동장에서 각자의 공연을 감상했다. 우리의 사물놀이 동아리 ‘산대배기’와 메리맥의 밴드부가 번갈아 진행했다. 이때 찍힌 사진이 있는데, 남들 다 웃을 때 나만 피곤해 죽을 듯 보였다. 또 대화해본 적 없는 친구들이 브이를 하고 말이다.
공연은 즐거웠고, 끝나고 본 미국 경찰차 구경은 더욱 즐거웠다. 메리맥 폴리스! 모든 구석구석이 드라마 같은 곳이었다. 마무리를 위해 시청각실로 다시 모인 우린 산발적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도 메리맥의 한 학생과 사진을 찍었다. 메리맥 학생 중 정말 미국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여학생이 있었다. 키도 크고, 정말 예뻤다. 이렇게 헤어지기에는 너무 아쉬울 것 같아,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짜내어 사진을 두 장 찍었다. 화질은 영 흐리지만, 다시 보니 반갑다.
그리고 메리맥의 로고 앞에서 같은 반 L, 그리고 K와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K는 방송부였고, 공부도 잘했다. 우린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K가 가끔 급식소에서 내 머리나 등을 툭 치고 가는 정도? 2학년인가, 음악 수행평가 때 둘이서 같은 조가 되었었다. 주위의 수상한 반응이 있긴 했지만, 우린 그냥 연습만 했다. 물론 내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점수는 망했지만. 아무튼, 우린 딱 그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K와 더 친해지고 싶었다. 물론 교실 밖을 나돌았던 탓에 내색은커녕 반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졸업 후에는 딱 2번 연락했다. 아쉽기만 하다. 너무 바빠진 우리지만, 여유가 생기면 꼭 만나고 싶다.
그렇게 청춘 드라마의 시간이 끝나고 다음 화가 시작되었다. 여행하면 쇼핑이 또 빠질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또 미국 고속도로를 달려 우드버리아울렛으로 향했다. 드넓은 평야에 수 놓인 비슷비슷한 외형의 건물들은 꼭 드라마 NCIS나 CSI를 생각나게 했다. 그곳에 풀린 우리는 종횡무진 쇼핑에 빠졌다. 나는 그곳에서 아빠 셔츠와 손목시계를 샀다. 셔츠를 살 때, 단위가 달라 조금 고생했다. 그래도 덩치가 꽤 있기에 맞는 걸 찾기까지 어렵진 않았다. 시계는 초등학생 때 홍콩에서 산 이후 관심이 생겼다. 그때는 하얀 디지털시계였는데, 이번에는 까만 아날로그로 정했다. 브랜드가 워낙 다양해 이것저것 껴보는 재미가 있었다. 쇼핑을 마치고 식당을 둘러보다 마카롱과 고기 채소, 밥이 든 걸 구매했다. 마카롱은 정말 달았고, 밥은 고기만 주워 먹었다.
이후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하루를 또 보내기엔 아쉬움이 너무 컸다. 우리는 10기 선배에게 들은 꿀팁을 토대로 전부가 모여도 넷뿐인 남자들과 여자애 셋이 모여 네 판을 시켜 먹었다. 피자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그것 자체가 이미 첫 일탈 비슷한 거였다. 재밌었다. 행복했다.
다음 날 아침, 또 고속도로를 달려 맨해튼 거리를 누볐다. 고개를 완전히 꺾여야 간신히 그 끝이 보이는 건물. 그런 건축물이 온 사방을 장악한 거리. 골목 여기저기를 찍으며 걷다 보니 월 스트리트의 황소 동상이었다. 누레진 불알도 만져보고,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또 걸어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자유의 여신상. 뉴욕의 상징이자 미국의 상징. 우리는 여객선을 타고 그 주위를 꽤 오래 돌았다. 머리로 불어오는 바람, 귀로 들려오는 영어, 눈으로 들어오는 여신상. 각도마다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보니, 뉴욕의 높은 건물들이 모여 있었다. 방금까지 저 사이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배에서 내린 삼 반, 통칭 さんくみ,의 단체 사진을 끝으로 쉑쉑버거를 먹으러 메디슨 스퀘어파크로 향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찾아보니 그곳이 쉑쉑버거 1호점이었다. 이날 먹은 쉑쉑버거를 시작으로, 대학생이 된 후 심심하면 동대문에서 쉑쉑버거를 사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내가 채소를 빼지 않고도 먹는 최초이자 최후의 버거일 것이다. 특히 감자와 밀크쉐이크에 반했다. 공원에 널브러진 채 버거를 먹던 나는 같은 반 K와 사진을 찍었다. 이 K는 하루 종일 자기만 해서 별명에도 잠이 들어간다. 참 미묘한 조합인 우린 이후 대학생이 되고도 가끔 만났다.
그렇게 햄버거를 해치운 우린 뉴욕 현대미술관 (MoMA)로 향했다.
그림에 관해서는 문외한이긴 하지만, 미술관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그 자리에 있는 작품들에 둘러싸이는 기분이 좋다. 그 유명하다는 고흐의 별 헤는 밤 앞에서 사진도 찍고, 피카소의 그림과 클림트의 키스도 찍었다. 이곳이었던가. 손연재 선수가 있다는 친구들의 웅성거림을 들었다. 보고 싶었는데, 소문만 들어 아쉽다. 어디 있는지 궁금해서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괜히 데이트하러 온 선수분께 실례라며 친구에게 한 소리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다 둘러봐도 시간이 남아 미술관 안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핫초코를 마시는 내 사진이 남아있는데, 하버드 모자, 하버드 후드티. 행색만 보면 하버드생 아니면 관광객 그 자체였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저녁을 먹고, 또 한식이었다, 타임스퀘어에 풀어졌다. 타임스퀘어! 그야말로 뉴욕의 중심에 내가 있다! M&M 초콜릿 가게에서 신발 끈도 사고, 사진도 찍고, 초콜릿도 샀다. 그리고 거리를 누비며 사진을 남겼다. 사람이, 정말. 정말 많았다. 개중에는 코스프레를 한 사람도 많았다. 함께 사진을 찍으면 돈을 내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주의가 있어 거리를 두었지만,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감상했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봤다. 누군가는 오페라의 유령을 봤고, 극소수는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라이언킹을 선택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무대와 은은하게 깔리는 주제가에 심장이 떨렸다. 그렇게 극이 올랐다. 아, 시작하자마자 어떤 외국인이 플래시를 터뜨려대며 사진을 찍었다. 모두의 야유를 한 몸에 받고 금세 조용해진 걸로 기억한다.
정말, 정말. 그 감정을 무엇으로 적어야 할까. 어떻게 써도 그것을 온전히, 아니 반의반도, 담지 못할 것 같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배우들이었다. 동물을 몸에 덧씌우고 무대를 뛰어노는 모습이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그 아이디어와 연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즐거웠고 행복했으며, 충격이었다. 나중에, 이곳에 돌아오면 오페라의 유령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또 다른 하루가 끝이 났다. 여행은 벌써 삼분의 일이나 지나고 말았다. 매분 영화 같고, 매초 꿈같다. 눈을 뜨면 또 다른 꿈이 시작된다는 사실이 설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