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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글 Jun 11. 2024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것

들여다본다는 것


들여다본다는 것



전시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전시 관람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이다. 멀리 떨어져서 보기. 가까이 가서 보기. 멀리 떨어져서 볼 때는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구도, 크기, 색감을 보기 위함이다. 더불어 공간 디자이너들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전시장을 크게 둘러보는 경우도 있다. 가까이서 볼 때는 그림의 질감이나 정확한 색깔을 보기 위함이다. 그림을 직접 가서 보는 것의 제일 큰 장점이다. 작가가 왜 이 재료로, 이러한 질감을 표현하고 싶어 했는지를 궁리하기도 한다. 가장 재미있는 점은 멀리서 봤을 때 내가 인식했던 색깔이 들여다보면 그 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파란색이라고 생각했던 색깔을 가까이서 보면 노랑, 초록, 보라색 등이 섞여있는 경우이다.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싶으면 보라색이나 초록색 계열이 많이 섞여있다. 또 파란색 이지만 경쾌하고 맑은 느낌을 낼 때는 노란색이나 흰색, 분홍색이 섞여 있기도하다.



식물도 그렇다. 식물을 좋아하기 전까지 나에게 식물은 그저 초록색과 갈색의 물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들여다보니 정말 다양한 형태와 색깔의 식물들이 있었다. 새로 나온 잎들은 연한 연두색, 오래된 잎은 진한 초록색, 햇볕을 많이 받은 선인장은 붉은색, 제 임무를 다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잎은 노란색과 갈색, 병이 든 잎은 검정색 등등... 색깔 뿐 아니라 무늬와 형태, 질감도 다양했다.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도 같다. 매일 같이 접하는 미디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그 사건들을 가십거리로 소비하거나 살아가는 것에 숨이 차서 외면하기도 한다. 혹은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건들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후에 흘러가는 시간을 지닌 사람이 있다. 사람은 평면적이고 단편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인간사에는 명확한 정답이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백온유 작가의 소설 <유원>의 주인공 ‘유원’은 아파트 화재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이다. 화재로 인해 11층에서 언니는 유원을 이불에 감싸 밖으로 떨어뜨린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떨어지는 유원을 받아내지만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유원은 10여 년간 ‘이불 아기’라는 별명을 낙인처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자신을 받아낸 아저씨에게는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평생 부채감을 갖게 된다.



내가 소설 속의 ‘누군가’여서 화재사건의 기사를 접했다면, 용감한 시민상을 받은 아저씨를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이불 아기는 평생 아저씨에게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그저 평면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일차원적인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사자인 ‘유원’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주어진 삶에 고마워하거나 기뻐하지 않는다. 다리를 절게 된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 오랜기간 유원에게 자책감과 부채감을 심어준다. 그런 아저씨에게 오랜기간 쩔쩔매는 부모님을 보는 유원은 부정적인 감정이 들어도 이내 외면하려 애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노랑과 초록, 보라색을 그저 파란색으로 판단하려 했을까? 혹은 미디어에서 얼마나 밝고 선명한 색들을 어두운 색으로 판단하게 만들었을까? 이제 그림을 감상하듯 세상을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보게 되었다. 사회에서 판단하거나 강요하는 전체적인 색상은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 정확한 색깔은 무엇이며, 내가 직접 느끼는 질감은 어떤 것일까?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에서는 말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관심이라는 명사의 동사형태가 아닐까? 때로는 우리가 어둡고 불쾌하다고 생각한 그림에 숨어있는 밝은 색을 찾기도 한다. 그때의 기쁨은 밝은 그림을 보았을 때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밝은 색을 찾은 그림을 다시 들여다 본다면 그것은 마냥 어두운 그림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더 많은 정확한 색을 찾아야 한다. 더 많이 들여다보고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명언인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정확한 색을 찾는 노력을 한다면 가까이서 봐도 희극을 찾는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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