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인용구
한강은 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서울 한복판엔 여전히 강이 흐른다
한밤에 찬란한 오색 윤슬
나부끼는 깃발은 질서 있는 아우성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려
빼앗긴 주권을 되찾으려
추운 거리로 광장으로 나왔고
다시 만난 우리, 다 만세다. 만세
동지야 오늘 밤은 길겠지만
내일부터 아침은 가까워진단다
앞으로도 날은 추워지지만
그때도 네 곁엔 내가 있을 거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던
당신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으니
그들의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올 겨울 동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우리가 바라는 주문이 들리도록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온 나라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는 정국을 뒤흔들었고, 주말마다 여의도와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대통령 탄핵을 외쳤다. 한동훈의 당원 게시판 논란, 명태균을 둘러싼 부정 여론 조작 및 국정 농단 이슈는 과거 바이든(날리면), 이태원 참사, 잼버리 사태, 부산 엑스포 등 숱한 논란이 그러했듯, 더 큰 사건에 의해 금세 묻혀버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달랐다. 이는 명백한 "내란"이자 민주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일이었기에, 탄핵에 대한 여론이 빠르게 모아졌다. 당연히 심판이 뒤따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12월 7일, 여당이 "탄핵 표결 불참"을 선언하고 김건희 특검이 불발되면서, 우리는 비상식을 공유하는 정치 집단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그날 이후 시민들은 긴 싸움을 예감하며 매일같이 집회에 나섰다. 나 또한 대전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낮에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말마다 기차표를 끊어 여의도를 찾아가 탄핵 가결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12월 14일. 고등학교 때부터 즐겨 듣던 꽃다지의 라이브 무대를 여의도 집회에서 직관하고 머지않아, 윤석열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순간, 함께 집회에 나선 친구들과 "다시 만난 세계"를 따라 부르며 잠시나마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겨우 204표라는 아슬아슬한 결과를 확인하며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국민의힘 의원들과 내란 범죄 세력이 그 후로도 보여주는 뻔뻔한 행보는 우리를 '반국가세력'으로, '체제전복세력'으로 기어코 만들었다.
12월 21일, 동지. 여느 해 같으면 서로 팥죽은 먹었는지 물으며 연말의 기분을 만끽했을 날, 다시 경복궁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있었다. 고백하면 나는 가지 않았다. 나도 일상이 있고, 연말 일정이 있으니까. 모처럼 쇼핑도 하고, 따뜻한 집에서 오랜만에 엄마가 해준 밥을 먹던 같은 시각, 한편에서는 윤석열 체포 및 구속을 외치며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농민들이 남태령 근처에서 경찰에 막혀 행진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경찰의 폭력 진압 소식을 접한 광장의 시민들은 농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남태령으로 향했다. 한 해에서 가장 긴 밤을, 위대한 시민들은 "차 빼라" 구호를 외치며 농민 곁을 지켰다. 그리고 22일 낮, 결국 경찰 차벽이 열리며 사당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했다.
SNS로, 뉴스로 전달되는 소식들은 나는 경외감을 안겨주었다.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의 약자들이 연대하여 서로의 아젠다를 공유하며 함께 승리했다. 어린 학생들과 중장년 어른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폭력에 맞섰다. 물론 날이 지나고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목소리 높이고 싸우고 하겠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2024년의 동지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박수 쳐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한편으로는 10년 전과 크게 달라진 시위 현장의 모습에도 큰 감동을 받고는 한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가던 시기였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나는 겁먹고 도망가지 않았을까? 우리도 성장하는 것이다.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더 질서 있고 평화롭게 저열한 권력에 맞서고 있다. 응원봉을 흔들고, 해학을 담은 깃발을 휘날리며, 한을 흥으로 승화해 노래하는 시민들에게 무력을 휘두를 수 있을까?
45년 만에 발생한 비상계엄에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 몇 차례의 대규모 집회에도 폭력 사태나 물대포를 활용한 시위 진압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의 말처럼,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다. 그 말을 믿게 하는 최근의 대한민국이다.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그렇게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솔직히 나는.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소위 '꿘' 동아리 하나 없는 대학에서, 먼발치서 지켜보기만 하며. 고작 후원금 몇 푼, 집회 참여 몇 번. 그런 주제에 좌파라고 떠들고 다니며 주위에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얕은 지식을 늘어놓는. 그런 비겁한...
부끄럽게도, 나는 일요일에 서울 코믹월드 행사를 갔다. 살면서 처음 가본 그곳에서, 어린 친구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캐릭터의 코스프레를 하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굿즈를 사고파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누군가는 이 시간에도 분투하고 있는데, 나는 고작 이런 곳에 왔다는 환멸감. 동시에 '고작 이런 곳'이라고 저들을 폄훼하는 주제에, 저들처럼 당당하게 전부를 내바칠 수 있는 진영 하나 없다는 것까지. 사실 이곳에서 각자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좋아하는 친구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오히려, 평화로운 시국 속에서 이들이 부담 없이 행사를 즐기는 나라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하는 우리다, 그 생각하며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언제쯤이면 나는 바쁘다는, 멀어서 어렵다는 핑계 없이 내 전부를 걸고 좇는 가치를 위해 몸 바칠 수 있을까. 나의 동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승리든 패배든 함께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런 부끄러움을 품은 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응원과 존경을 글에 담는 일뿐이라 이런 글을 쓴다. 꽃다지의 <주문> 가사처럼,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되어야 해.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이 더 아름다울 수 있게.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가 들리는 날까지. 모두 파이팅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동영상 출처 정운 님(twitter: @coke_cloud, instagram: @jeongun.jpg)
썸네일 사진 출처: 정운 님(twitter: @coke_cloud, instagram: @jeongun.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