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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누리는 자유는 없었다

[리뷰] 영화 <해리엇>

by 김남정

넷플릭스에서 영화 <해리엇(Harriet)> 을 보며 나는 스크린 속 한 여인의 얼굴에서 이상한 울림을 느꼈다. 이야기의 울림이 크다거나, 감동적인 실화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잔상이었다. 19세기 미국 메릴랜드 주에서 노예로 태어나 스스로 자유를 얻고, 다시 목숨을 걸고 남부로 돌아가 수많은 인생을 이끌어낸 여성 해리엇 터브먼. 그녀의 이름은 이미 역사에 새겨져 있지만, 영화는 그 이름 뒤에 놓인 감정과 결심을 다시 한번 우리 앞에 세운다.



영화를 보며 가장 크게 떠올랐던 문장은 이것이었다.



"나 혼자만 잘 살면, 정말 충분한가."



해리엇의 여정은 이 질문을 깊고 고요하게 되묻는다.


IE003556526_STD.jpg ▲넷플릭스 영화 <해리엇> 미국 노예 해방 운동가 중 한 명인 해리엇 터브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넷플릭스


자유는 '혼자'완성되지 않는다... 위험 속에서 피어난 존엄



영화는 노예제 사회의 잔혹한 현실에서 시작된다. 해리엇에게 노예 신분은 단순한 제약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언제든지 팔려나갈 수 있는 삶, 자기 의지로는 그 어떤 미래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 법 앞에서도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그러나 영화 속 해리엇은 그 절망적 조건 속에서도 묘하게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의 내면에는 '자유'라는 작은 불씨가 이미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해리엇이 북부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당신은 자유입니다"라고 선언받는 장면이 있다. 관공서 직원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그것이 기록되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 인정받는다. 이 짧은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강렬한 순간 중 하나다. 자유란 도망쳐 얻은 지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엄을 되찾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해리엇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많은 도망 노예들이 두 번 다시 남부를 돌아보지 않으려 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가족을 데려오겠다"라며 다시 위험한 길로 발을 돌린다. 왜 돌아가야만 했을까? 자유라는 꿈을 이루었으면, 왜 그 자유를 안전하게 지키지 않았을까?



해리엇은 자유를 개인의 성취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는 함께 도달해야 완성되는 가치라고 믿었다. 그녀가 직접 만든 탈출 경로와 동료들과 협력해 구축한 '지하철도(Undeground Railroad)'는 그 신념을 압축해 보여준다. 무려 13차례의 귀환, 수십 명의 동행, 그리고 그 사이사이 수많은 죽음의 위협이 있었다.



영화 속 숲과 강을 건너는 장면은 그녀의 신념을 압축해 보여준다. 쫓기고, 숨고, 도망쳐야 하는 와중에도 해리엇은 물살을 주저하지 않는다. 두려움 앞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며, '누군가는 먼저 건너가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의 표식이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우리 삶의 여러 순간을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위험을 알지만 선택해야 하는 강이 있다. 지금 건너지 않으면 영영 건널 수 없을지도 모르는 강. 해리엇은 그런 강을 수차례 건넜고, 그 용기 속에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향한 시선이 있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읽는 해리엇의 질문



해리엇 터브먼 이 왜 지금까지 미국에서 인권과 용기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지 영화는 자연스레 보여준다. 최근에도 그녀의 얼굴을 20달러 지폐에 새기자는 논의가 이어지는 것은 결코 단순한 기념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폭력과 착취를 잊지 않기 위한 행위이자, 새로운 가치 위에 사회를 세우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영화 속 해리엇은 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길을 찾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 표현을 종교적 장면으로만 읽기보다, 그녀의 내면에서 울리는 확신의 목소리로 읽을 때 더 깊다. '가야 할 길을 아는 사람'은 실제로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이다. 해리엇이 보여준 길 찾기는 그녀의 삶을 붙들고 있던 신념의 목소리였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불평등, 혐오, 차별의 경계에 서 있다. 누군가는 혼자 목소리를 내기에 너무 위험한 자리에 있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내 문제만 아니면 된다'는 말로 안도시키곤 한다. 그래서 영화 <해리엇>은 19세기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놀라울 만큼 현재적이다. 해리엇 터브먼이 남긴 질문은 시간의 흐름에 무뎌지지 않는다.


영화 속 해리엇은 영웅으로 연출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신념에 진실하려 했던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은 더 큰 울림을 준다. 용기는 두려움이 지워진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나아가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삶으로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오랫동안 이 문장을 떠올렸다.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이 문장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나침반 같다. 해리엇의 삶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던 연대의 감각을 일깨우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혼자 누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갔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이들이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한다. 자유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건널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3188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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