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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 Sep 26. 2022

코끝 찡한 초록의 아이야.

첫 파종을 한 작물은 청갓이었다. 이유라고 한다면 맛있다. 그냥 맛있는 것이 아니라 개성 있게 맛이 있다. 여수의 아무 백반집이나 가면 반드시 밑반찬으로 나오는 것이 갓김치다. 하지만 대부분 푸욱 익어 신맛이 강해진 버전(?)이다. 나는 익지 않은 생(生) 갓김치를 좋아한다. 겨자과 식물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코끝 찡한 알싸함은 다른 김치에선 찾아볼 수 없다. 코를 막고 음식을 먹으면 미각이 현격히 둔해진다. 코가 뻥 뚫리는 알싸함은 없던 입맛은 되찾아주고, 식욕에 워밍업을 마무리해준다.

혹시 생 갓을 먹어보았는가? 청(靑)갓이든 홍(紅)갓이든 누가 더 강하다 할 것도 없이 아삭하고 찡하다. 하정우 님 김 먹방 마냥 씹어 삼키기도 하고, 상추처럼 고기에 싸서 먹어도 훌륭하다. 시래기처럼 바짝 말려서 생선조림에 사용하면 특유의 비린맛을 잡아주고 씹을 때마다 고소 쌉쌀한 맛이 별미다.

서론이 길어졌다. 처음 농사를 지으면 으레 실수하는 것이 있다. 양(量) 측정에 실패해 엄청난 재고가 쌓이는 것. 그리고 시기를 놓쳐 외계인(?)을 만나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겨자과 식물은 추수시기를 놓치면 거대한 크기로 개화(開花)한다. 그 모습은 아담스키 박사가 조우한 금성인 오손이 아니고 울트라맨에 나오는 발탄 성인처럼 친해지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내가 뭘 만든 거지… 게으름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가지나...

엄청난 양의 청갓. 일단 김치를 담그고 겉절이로 해 먹었다. 뭐야 금방 먹겠네? 하지만 우리 집에 냉장창고가 있기도 만무하고, 잎채소는 생각보다 금방 상한다.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했다. 처음 키운 아이들을 금방 흙으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전엔 생소했지만 이젠 동네 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소스 페스토 또는 페스토 알라 제노베세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소스이다. 빻은 마늘, 잣, 굵은소금, 바질 잎, 파르 미자노 레자노, 페코리노 사르도를 올리브유와 갈아서 만든다(위키백과).

Jamie oliver - How to made homemade Pesto (Youtube)

제이미 올리버가 텃밭에서 갓 따온 바질을 손뼉 치듯 손으로 펑펑 내리치고 뜯어서 신속하게 페스토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속이 시원하다. 일련의 과정들이 2분이 채 걸리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만든 바질페스토는 파스타, 샌드위치, 그 밖의 요리에 첨가하여 신선한 색과 맛을 구연해냈다. 어쩌면 저 방법이라면? 급속히 생기를 잃어가는 나의 청갓에 숨을 불어넣고 싶었다. 하지만 갓을 제외한 재료를 동일하게 하면 끔찍한 혼종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지극히 한국적인 소스. 하지만 호불호가 없는 소스를 만들고자 올리브는 참기름. 바디감을 살릴 치즈와 잣은 메주콩(국산 대두)으로 대체하였다. 레바논과 그리스에서 즐겨먹는 후무스(Hummus)처럼 병아리콩을 써 보았으나 뭔가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만든 갓페스토는 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평온해질 정도로 맑은 연두색을 뗬다. 이렇게 평화적인 연두색이라니, 분명 맛도 평화롭겠지? 첫맛은 정말 감탄 그 자체였다. 강렬하지만 한식 특유의 익숙함이 느껴지는 맛… 도 잠시 배가 슬슬 아파왔다.

문제의 위장파괴(?) 페스토

나의 갓페스토 첫 시제품은 코가 뻥 뚫리는 감탄스러운 맛이었지만 동시에 위장에도 구멍을 뚫을 정도로 강렬한 개성을 뽐냈다. 와우 누가 내 위장 벽을 성실하게 사포질하고 있어. 다행히 이 맛은 지구상에서 오직 나 혼자만 아는 맛으로 남았다.. 서둘러 다음 플랜에 착수해야 했다. 나까지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갓을 데쳐서 사용해보았다. 베스트셀러 더 푸드랩(The food lab)의 저자이자 요리연구가 켄지 로페즈(James Kenji López-Alt) 형님(?)께서는 바로 먹을 것이 아니라면 색감과 저장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메인 재료를 데친 후 페스토를 제조하길 권유한다. 그 방법은 통했다. 역시 요리계의 구루(Guru)는 다르군!

그는 128만 유튜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법이라도 수분 함량이 높아진 이상 저장성이 2주 이상 가기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치면서 갓 특유의 알싸한 향이 전부 날아가버렸다. 이러면 우거지를 데쳐서 해도 모르겠는걸? 내가 원하는 것은 수개월 단위로 저장성과 색감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갓의 알싸한 개성을 보존하는 방법이었다(바라는 것도 많다.). 이런 방법이 있긴 한 걸까? 그러나 나는 결국 그 방법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 방법을 여기서 공유하지 못하는 점은 이해해주길 바란다.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려줄 순 없지 않은가. 집에서 실험하던 소소한 여정이 어쩌다 보니 정식 제품 출시까지 이어졌거든.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나의 갓페스토는 정말 더럽게 인기가 없다. 반년 사이에 한 100병도 못 팔았으니까. 이름만 들으면 무슨 맛인지 감이 안 오는 의문의 소스에 흔쾌히 돈을 지불할 이타적인 분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맛은 끝내준다. 밥, 빵, 면 지구상의 온갖 탄소화물들이 같이 놀자고 달려올 맛이다. 오죽하면 저칼로리인데도 다이어트에 좋지 않다는 문구를 생각해냈을까? 제작 시간이 이틀이나 걸리고 재료 수급도 쉽지 않고, 판매량도 저조하고... 어쨌든 생애 첫 제품을 단종시킬 생각은 없다.

초심(初心)을 생각나게 하는 초록의 코끝 찡한 알싸한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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