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뜻을 지닌 절기로, 추운 겨울이 가고 이른바 봄을 맞는 시기이다. 춥던 날씨도 누그러지고 봄기운이 돌며 초목이 싹튼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그 책이 ‘도서관을 소재로 쓴 소설’이란 말을 듣고 서둘러 검색해보았다. 도서관이 배경인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자연스레 흥미를 느껴왔는데, 심지어 유명한 소설가들의 작품이라니!¹ 소설가 중에는 정지돈 작가도 있었다. 마침 Axt 1월호에 실린 정지돈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있던 터였고, 그가 쓴 도서관 소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바로 살 생각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보았다. 그런데 어디서도 그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 책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책이었다.
출판사 이름을 검색해보니 작년 2월에 개관한 도서관이 나왔다.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소전서림’이라는 문학 전문 도서관이었다. 여기를 소개하는 온갖 곳에서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에 나도 써보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공도서관과는 다른 곳이다. 일일 방문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전일권은 5만원, 반일권(5시간)은 3만원이었다. 입장료 안에는 거기서 진행하는 워크숍과 이벤트 참여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지만 사실 일반 공공도서관에서는 모든 행사가 무료이기 때문에 이것도 내가 생각하는 ‘도서관’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회원이 되어 연회비를 내면 입장료의 50%를 할인받을 수 있는데 연회비가 타입 별로 66만원, 240만원, 270만원이다. 금액만으로도 ‘너 오지 마’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문제는 거기서 출간한 책을 보려면 회원으로 가입하거나(회원에 한해 무료 배포해준다) 입장료를 내고 안에 들어가서 읽고 나오는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반일권을 끊고 입장한다고 해도 3만원이 들었다. 책 한 권 값보다도 비싼 돈을 들여 그 먼 청담동까지 가서 책을 읽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열이 났다. 읽고 싶은 책을 두고 비용을 따지게 만들어서 더 화가 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이 정체불명의 공간을 두고 여기저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도서관’이라는 말 때문이다.
도서관법 제1장 총칙
제1조(목적)이 법은 국민의 정보 접근권과 알 권리를 보장하는 도서관의 사회적 책임과 그 역할 수행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여, 도서관의 육성과 서비스를 활성화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대한 자료의 효율적인 제공과 유통, 정보접근 및 이용의 격차해소, 평생교육의 증진 등 국가 및 사회의 문화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²
혹시라도 내가 도서관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도서관법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 법령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도서관의 존재 이유와 가장 부합한다고 여기는 부분이 바로 ‘정보접근 및 이용의 격차해소’인데 격차를 해소하기에 하루 5만원의 격차가 너무 컸다. 애초에 ‘한정된 고객에게 차별화된 문화 서비스를 제공’³하는 게 설립 취지라고 밝혔으니 이 도서관의 존재 이유는 결국 ‘차별’인데, 이토록 차별적이고 실험적인 공간에 왜 ‘도서관’이란 말을 사용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기사에 보도된 관장의 말에 따르면 ‘다수의 대중이 찾기보다는 취향이 비슷한 문화 애호가들이 모일 수 있는 파리의 살롱을 꿈’⁴꾸었다고 하는데, 그럼 그냥 ‘살롱’이나 ‘북카페’라고 할 것이지 왜 굳이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지. 도서관이 갖고 있는 좋은 이미지만 가져가되 강남 인근에 살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오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도서관을 지나치게 숭고한 공간으로, 세상의 모든 불평등과 불균형으로부터 가장 먼 이상적인 공간으로 여기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도서관’이란 말에 임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책이 있는 장소’에서 쓰겠다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떠드느냐고 하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도서관이 그곳의 정식 명칭인 것도 아니고 그저 좋은 취지로 ‘표방’한다고 했으니 더더욱. 하지만 도서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복지이고 사회보장인데, 모두가 언제든 편히 갈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의 첫째 조건인데 어떻게 이걸 무시한 채 도서관을 ‘표방’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한번 가보기로 했다. 하루에 3만원도 못 벌고 있지만 그 3만원을 기꺼이 써보기로 했다. 과연 이 돈과, 집에서 거기까지 가는 수고가 아깝지 않을지 일단 가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의외로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잖아? 게다가 거기 가면 궁금해 하던 그 책도 읽어볼 수 있다. 대출이 안 되는 곳이니 다른 누군가가 붙들고 있지만 않는다면 나도 거기서 읽고 올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 지도 앱을 켜서 위치를 확인해보았다. 집에서 거기까지 가는 다양한 경로가 나왔고 모두 두 번 이상 환승해야 했으며 최단 시간은 1시간 2분이었다. 최단 시간 경로는 네 번을 환승해야 했기에 1시간 9분짜리 경로를 택했다. 집에서 망원역까지 걸어간 뒤(10분), 6호선을 타고 삼각지역으로 가서(13분), 4호선을 타고 이수역에 내리고(10분), 7호선을 타고 청담역에서 하차(14분), 지상으로 나와 752미터를 걸으면(11분) 목적지에 도착한다.
전철 안은 한산했다. 7호선 청담역 14번 출구로 나오자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십여 분 정도 직진하자 사진과 똑같은 큐브 모양을 한 독특한 구조의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다. 입구에서 일일방문객임을 밝히고 결제는 카드로 했다. 결제 내역을 알리는 휴대폰 진동음과 함께 하얀색 출입증을 받았다. 카페면서 와인 바 같기도 한 1층 공간을 지나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가자 라커룸이 나타났다. 노트북과 필기도구만 꺼내 들고 가방은 라커에 보관했다. 라커룸에서 이어지는 좁은 복도의 오른편에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앵그르를 따라 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Oedipus and the Sphinx after Ingres〉가 걸려 있었고, 그림이 있는 곳에서 멈춘 뒤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도서관’이 펼쳐졌다.
사진으로 하도 봤기 때문인지 꼭 드라마 세트장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카메라로 나를 찍고 있는 것만 같은 공연한 기분에 고개를 쳐들고 CCTV 위치를 확인했다. 나를 의식하는 건 나 자신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공간에 집중하기가 꽤나 어려웠다. 방금 전에 지불한 입장료가 벌써부터 아까워지기 전에 서둘러 서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책은 분야별, 국가별, 작가별로 분류되어 있었고, 책등 하단에 위치 표기가 되어 있어 검색이 가능했다. 검색대에서 읽고 싶은 그 책을 검색했다. 마침내 소설 서가에서 그 책을 찾았다. 너로구나.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책. 돈 주고 살 수도, 도서관에서 빌릴 수도 없는 책. 나는 스페이스 코펜하겐에서 디자인한 ‘스운 라운지’에 느긋하게 앉아 그 책을 다 읽고 왔다.
그래서 3만원이 아깝지 않았느냐고? 글쎄. 모르겠다. 나는 3만원을 쓰지도 않았고, 거기에 가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전철 안은 한산했다’라는 문장부터 방금 전까지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거기를 소개하는 영상과 사진을 참고해서 가상으로 쓴 이야기다.
방문 하루 전날까지만 해도 다음날 그곳에 갈 생각에 약간 설레기도 했다. 이용 방법을 미리 확인하려고 유튜브를 찾아보았는데 여러 영상 중에 거기서 직접 제작한 영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작년 2월 개관식 장면이 담겨 있었다. 2분 남짓 되는 영상을 보던 중에 나는 재생을 멈추었고, 마음을 바꾸어 그곳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영상 속에는 개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보였다. 개관식까지 입장료를 받았을 리 없으니 거기 모인 사람은 모두 초대를 받았을 거였다. 소수의 사람들이 거기 앉아서 공연을 관람하고, 관장과 이사장의 인사말을 듣고, 와인을 마시며 즐기는 모습에서 괴이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순간 그 공간이 애초에 거기 초대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 같았다. 관장이 말한 ‘한정된 고객’과 ‘차별화된 문화 서비스’를 목도한 순간이었고, 곧바로 저곳이 무료라고 해도 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 곳에 3만원을 내고서라도 다녀오겠다는 어리석은 계획을 품다니, 그 시간마저 아까웠다.
관심 있는 작가가 거기서 책을 출간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서 입장료 3만원을 받든 300만원을 받든, 누군가 거기 모여 와인 파티를 벌이든, 연주회를 열든, 예술가들과 인맥을 쌓든 그러라지 뭐,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저 백화점 VIP 고객을 위한 전용 공간이라 여기고 그냥 눈길을 안 주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다 내버려두더라도 거기가 ‘도서관’으로 소개되는 것만은 싫다. 도서관만큼은 누구라도, 언제라도, 기꺼이 초대하는 모두의 곳이라는 인식이 흩어지고 훼손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 도서관이고, 좋은 문화를 향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란 걸 배우는 곳이 도서관이었으면 좋겠다. 그 ‘럭셔리’하고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차별 없는 세상을 도모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기에 싫은 마음만으로 이렇게 긴 글을 쓴다.
그나저나 거기서 출간한 책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작가에게 따로 문의를 해볼까? 작가님! 작가님의 글을 읽고 싶은데 방법이 없습니다. 그 이상한 곳에 내야 하는 입장료를 차라리 작가님께 직접 드릴 테니 책을 보내주실 수는 없을까요? 아아, 작가님도 회원이 아니라서 책이 없다고요? 네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