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절기다. 이 무렵에 서민들은 추어탕鰍魚湯을 즐겼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미꾸라지가 양기陽氣를 돋우는 데 좋다고 하였는데, 미꾸라지를 ‘가을에 누렇게 살찌는 가을 고기’라는 뜻의 추어秋魚라고도 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네이버에서 오버프린트랑 녹아웃 찾아보세요.”
인쇄소 사장님과 통화를 끝내고 두 용어를 검색해보았다. 꽤 많은 사람이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내용을 거듭 살피며 또 한 번 배웠다. 아직도 처음 들어보는 용어가 있고, 여전히 배울 게 있다니. 아니지, 내가 알고 있고 할 줄 아는 건 출판이라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시작해버렸고, 하면서 알음알음 알아가고 있는 게 전부니까. 사실 이 재미로 계속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하나라도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나 사건을 마주하게 되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물론 잠깐은 창피하지만.
작년 겨울부터 막연히 생각했던 ‘기차에 대한 책’이 이렇고 저런 시행착오를 거치고 계획이 뚜렷해지면서 ‘기차와 영화가 만나는 곳’이라는 부제를 단 『극장칸』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어제 인쇄를 맡겼다. 인쇄를 맡기기 직전까지 더 고쳐야 할 곳이 있는지 계속 살펴보았지만 한편으로는 100퍼센트 완벽하게 살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어떤 책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이 편해야 오류도 잘 발견하는 법. 인쇄소 사장님과 스무 번쯤 통화를 하고 인쇄소 웹하드에 최최최종본을 올리고 난 다음에는 가능하면 원고 파일을 열어보지 않는다.
점심으로 추어탕을 먹었다. 평소에 즐겨 먹거나 좋아하는 음식은 아닌데 가을에 서민들이 추어탕을 즐겼다는 얘기를 듣고 갑자기 입맛이 돌았다. 추어탕을 먹으면 왠지 나도 기운이 날 것 같았다. 기운이 떨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지난주에 맞은 코로나 2차 백신이 가장 유력했다. 주사를 맞고 사흘을 누워 있었더니 3킬로가 빠졌다. 먹는 것마다 게워내기를 반복했다. 이게 바로 후유증이라는 건가. 아니, 혹시 이게 바로 코로나인가! 병원에 갈 기운조차 없어서 119를 부를까 어떻게 할까 하는 사이 잠잠해졌다.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었다.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힘으로 일어나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밑반찬과 함께 배달된 뜨끈한 추어탕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특히 온몸이 거부했던 일은 화면을 보는 일이었다. 휴대폰 불빛조차 눈과 머리를 아프게 해서 멀찌감치 떨어뜨려놓았다. 원고를 쓰거나 편집하고, 표지를 만들고, 메일을 읽거나 보내고, 계산서를 발행하는 일도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괴로웠던 것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어도 머릿속에서 온갖 장면이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머릿속에 노트북 한 대가 통째로 들어가 있었고 24시간 꺼지지 않는 화면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동안 충분히 쉬면서 천천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걸까. 속도는 줄었지만 책을 만드는 부담은 점점 커져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앞으론 화면 보는 시간을 좀 줄여야겠다.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그동안 너무 많이 봤다.
그나마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종이책을 읽는 거였다. 사흘을 앓고 나서 읽어선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재미가 새삼 신선했고 종이의 미색이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책의 내용도 영향을 주었다. 정지돈 작가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이었는데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란 부제에 걸맞게 모든 에피소드가 산책하며 구경하는 풍경처럼 적당히 가볍고 유쾌했다. 어딘가를 걷고 또 걷지만 뭔가 대단한 것을 찾아가는 건 아닌 것 같고 그저 걷는 동안의 상념과 우스꽝스런 대화가 전부인 이야기인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정말로 대단한 것을 찾아가는 이야기 혹은 마침내 그것을 찾는 이야기는 생각만 해도 지루하다. 문학동네 웹진에서 연재했을 때 이미 읽었는데 종이책으로 다시 읽으니 새로웠다. 어쩌면 종이책은 치유의 목적으로라도 지속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손으로 쓸고 넘기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안정감을 대신할 기계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런 기계가 나오기 전까지는 나도 계속 종이책을 만들고 싶다. 앞으로 점점 더 느려지더라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