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리는 시기를 뜻하는 절기이다. 가을의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는 대신 밤의 기온이 매우 낮아져서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며, 온도가 더 낮아지면 첫얼음이 얼기도 한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며 국화도 활짝 피는 늦가을의 계절이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지난여름에 제안을 받고 쓴 글이 가을이 가기 전에 책으로 나왔다. 본문 내용이 표지부터 시작하는 16페이지의 작고 얇은 책이어서 가능했지만 열 명의 작가에게 글을 받아 열 권을 따로 만들었으니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이나 다름없다.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이메일 몇 통 오고 간 게 작업의 전부였는데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다. 어쩌면 그걸 이미 알고 제안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기획 의도와 방향이 확실했고 책의 크기와 분량도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제목의 일부까지. 생각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작은 범위 안에서 최대치를 생각할 수 있었다.
오늘 실물 책을 받았다. 펼쳐보자마자 헉 소리가 나게 숨을 들이쉬었다. 본문의 열이 최종본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쓰는 동안에도 몰랐고, PDF 파일을 두어 차례 확인하는 동안에도 바꿔볼 생각을 못했는데, 인쇄된 책을 보자 바뀐 부분이 절묘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세상에! 우연인가? 마치 문장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장이라는 게 절대로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갈 리가 없으니 인쇄 직전까지 생각하고 고쳤을 편집자님에게 감사할 수밖에. 이 희열을 나 혼자 느끼기 아까워서 박수영이 퇴근하자마자 책을 들이밀며 외쳤다. 이거 정말 기가 막히지 않아?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어서 금세 공허해졌지만 괜찮았다. 이 책을 읽는 100명 중 한 명은 ‘이거 정말 기가 막히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100부만 찍는다고 했는데 그 한 명이 나려나?
주문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일몰 후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를 쓰는 거였다. 둘째, 누군가 잠들기 전에 스마트폰 화면 대신 볼 수 있어야 했고, 셋째, 그 글을 읽고 단잠을 잘 수 있어야 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어려운 주문 같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는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밤을 배경으로 쓰되 어둡거나 쓸쓸하기만 한 분위기는 피하고, 잠들기 전이면 만지작거리게 되는 스마트폰을 그 무엇으로 이길 수 있겠냐만 그런데도 종이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담아보기로 했다. 밤에 하는 일이라곤 가만히 앉아서 글을 쓰거나 멍하니 있는 것뿐이라 그런 내 모습을 그대로 쓰는 건 재미없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짓는 게 일이라면 그 이야기 자체를 담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1부에서 보여준 다음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가뜩이나 얇은 책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쯤 해두어야겠다. 그나저나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함께 만든 책이라 더더욱. 혼자 만든 책도 잘 팔리면 좋겠지만 나 아닌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손을 보탠 책은 그만큼 더 팔리고 더 알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쓰기도 했다. 한 명이라도 ‘이거 정말 기가 막히네!’라고 생각해주길 바라면서.
곧 나올 책도 있으니 박수영은 이만하면 올해 농사 끝낸 것 아니냐고 했지만 나는 어서 다음 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한참 걸릴 거라고, 점점 그렇게 될 거라고 말이다. 무엇보다 한 달에 3만 7천 원 하는 어도비 인디자인 결제일이 오늘인 걸 잊고 있었다. 이 돈이 아깝지 않으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이제 슬슬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벌써부터 아득해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