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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Nov 22. 2021

소설小雪

11.22.(양력), 태양 황경 240°

첫눈이 내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무렵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져서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는 등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한다.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지난 10월 말에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장래희망이 도서관 사서라고 하는 그 학생은 인근의 한 대학교 문헌정보학과와 함께 휴먼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내게 인터뷰를 청했다. 인터뷰는 서면으로 할 예정이고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카드 뉴스를 만들 라고 했다. 나는 SNS에서 흔히 보던 대여섯 장 안팎의 간단한 카드 뉴스를 생각했고, 그렇다면 질문의 양도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도 그렇지만 먼 곳의 한 고등학생이 도서관 사서가 꿈이라고 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질문을 보내달라고 했다.  

    

질문이 담긴 메일이 온 건 그로부터 열흘이 훌쩍 지난 11월 9일이었다. 첨부된 한글 파일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질문이 너무 많았다! 상위 질문과 하위 질문을 포함해 열일곱 개의 질문이 A4 세 페이지를 꽉 채웠고, 모두 긴 시간의 생각과 정리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이래서 질문지 보내는 데에 오래 걸렸구나. 절로 납득이 갔다. 학생은 내가 쓴 책의 제목과 페이지를 언급해가며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했고, 그런 점에서 사서 지망생만이 할 수 있는 정확하고 세심한 질문이 많았다. 그야 그렇지만 처음부터 질문의 수가 이 정도는 될 거라고 미리 말해주지 않은 학생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이 질문에 다 답을 하려면 하루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떡해. 이미 하기로 했으니.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해주기로 결심하고 차근차근 답변을 달기 시작했다.      


사서라는 직업에 갖는 흔한 오해에 대한 생각, 사서로서의 특별한 경험, 위탁 도서관 관련 문제 등등 이전에 받아본 적이 있던 친숙한 질문이 이어졌다. 도서관을 그만둔 지 3년이 넘었는데도 모든 게 생생해서 걱정했던 것보단 막힘 없이 답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 열한 번째 질문 앞에서 멈추었다. 키보드 위에 놓여 있던 손가락이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Q. 지금은 옛날과 다르게 온전히 작가와 독립출판에 힘을 쏟고 계시는데 이렇게 사서의 삶에서 온전한 작가의 삶으로 넘어가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계신가요?         


두 번째 문장이 자꾸만 볼드체로 보였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계신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질문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정곡을 찔렀다. 이 아이 뭐지? 왜 저런 질문을 하는 거지?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고등학생이 아니라 세상이 내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지금의 삶에 만족하니?     


일단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순서대로 하지 않고 중간에 하나를 건너뛰었다는 사실이 계속 신경 쓰여서 집중이 안 되었다. 다시 열한 번째 질문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기분이 이상야릇해졌고 약간 서글퍼지기도 했는데 마침내는 조금 기뻤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해주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대답할 기회를 준 거니까. 미래에 도서관 사서가 될지도 모를 학생에게 내심 고마웠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꿈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지만.      


도서관 사서 경력 4년 6개월. 퇴사 후 1인 출판사 경력 3년 5개월. 위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A. 독립출판을 덜컥 시작해버렸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지만 100퍼센트 만족스럽다기보다는 제가 선택한 길이니 일단은 책임을 다하자는 생각이에요. 이전 생활과의 다른 점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지시에 휘둘리지 않고 저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해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이죠.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매진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은 과감히 버릴 수도 있고요. 새로운 것을 쓰고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은 있지만 아직은 계속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 모두 하나같이 마음을 건드렸다. 사서와 함께했던 작가 생활에 대해, 도서관 내부에서 불합리를 겪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예비 사서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 시작할 땐 가볍게 여겼는데 질문에 답을 할 때마다 ‘내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해도 되는 사람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 현직 도서관 사서가 얼마나 많은데 왜 나한테? 진즉에 도서관을 떠나온 나한테 왜……. 책을 낸다는 건 이런 의미일까. 도망갈 생각이 아니라면 그 책을 읽은 누군가의 질문에 답을 해줘야 한다는 것. 사실 내가 쓴 책에는 온통 질문뿐인데. 나도 답이 없는데. 그런데도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답을 해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한테 물어본 거니까.      


마침내 열일곱 번째 질문의 답을 끝내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며 두어 번 수정을 한 뒤 학생에게 메일을 보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끝내고 난 다음주였으니 어느새 11월 중순이었다. 메일을 보내면서 나중에 파일 형태로라도 받아보았으면 좋겠다고 썼는데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휴먼책이라니. 도서관 다닐 때 행사하면서 다른 누군가를 휴먼책으로 모셔보기만 했지 내가 휴먼책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갖자! 책임을 다하자!(느낌표는 왜?) 내 휴먼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또 한 번  ‘너의 이번 생에 만족하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망설이지 않고 잘 대답할 수 있도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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