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연은 침대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임신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태주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태주의 아이를 가졌지만, 결혼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결혼이란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하고, 서로의 꿈과 가치관을 존중하며 함께 나아가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일이었다.
‘태주에게 의지해서 결혼을 밀어붙이고 싶지 않아.’
가연은 혼잣말을 했다.
그녀는 태주의 막강한 재력과 사회적 배경에 얽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저 책임감 때문에 결혼하는 것은 그녀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다. 하지만 가연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몸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 아이에게는 무엇이 최선일까?"
그녀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현실은 결혼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상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태주와의 결혼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주위의 기대와 달리, 가연은 아직 결혼이라는 선택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태주 역시, 사랑과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에게 더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과연 나의 고집이 옳은가? 아니면 새로운 가족을 위해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가연은 결국 백운 선사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산사로 올라가는 길은 고요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선방에 도착한 가연은 백운 선사에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았다.
“선사님, 저는 태주의 아이를 가졌지만, 결혼이 옳은 선택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은데, 저 혼자서 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백운 선사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결혼은 단순한 책임이 아니라 인생을 함께 나누는 약속이다.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지. 네가 느끼는 부담을 잘 이해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너희가 함께 나누어야 할 소중한 인연이다."
가연은 선사의 말을 곱씹었다. 결혼이란 단순히 사랑과 책임을 넘어서, 함께 인생을 나누는 동반자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너의 고민은 아이뿐만이 아니지 않니?”
백운 선사가 물었다. 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그룹과 나라병원이 추진 중인 바이오사업이 떠올랐다. 이 프로젝트는 태주와 가연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백운 선사는 이어 말했다.
"아버지 장한국 박사와 나라병원, 그리고 태주가 속한 제일그룹은 이미 인연으로 엮여 있단다. 이 인연을 잘 살린다면, 너와 태주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큰 이익이 될 것이다. 결혼이라는 인연이 그 길을 열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백운 선사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밥그릇이 있다. 그 밥그릇의 크기와 모양은 운명에 의해 정해진다. 그 밥그릇을 그냥 따르느냐, 아니면 그 위에 더 큰 공덕을 쌓아 가느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에 지은 업은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상수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상수를 넘어서는 변수를 만들 수 있다."
백운 선사는 차분히 가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결혼 또한 하나의 운명이지만, 그 안에서도 변수를 만들 수 있다. 네가 태주와 함께 만들어갈 미래는 네 노력에 달려 있다. 타고난 밥그릇이 작다고 그 인연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 밥그릇을 채우는 것은 너의 선택인 것이다."
가연은 선사의 말을 들으며 결혼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인생의 상수와 변수,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가연은 백운 선사의 조언을 듣고 나서야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졌다. 결혼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주와 자신이 함께 만들어 나갈 미래, 그리고 그 미래의 일부로서 아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태주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라병원과 제일그룹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바이오 사업의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두 집안은 정략결혼을 계획 중이었으나, 태주와 가연 사이의 일이 밝혀지며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일그룹 회장의 부인 원심은 나라병원 박 원장을 만나 지금까지 진행되던 결혼 이야기를 더는 추진할 수 없다고 전했다. 박 원장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 가연이라는 여자가 태주를 유혹한 거잖아요! 나쁜 년! 이건 다 그 여자 탓입니다!"
박 원장의 격한 비난에 원심은 차갑게 응수했다.
"가연은 내 아들의 아이를 가진 아이로서, 내 며느리가 될 사람이니 그런 말은 삼가시는 게 좋겠어…."
두 사람의 신뢰는 그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원심은 박 원장의 기분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며 말을 이었다.
"바이오 프로젝트는 그대로 진행될 거야. 회장님 한데 잘 부탁드려 놓을게."
박 원장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남편 장한국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토로했다.
"여보, 집에서 얘기해요. 더는 못 참겠어요."
나라병원과 제일그룹 간의 혼사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나라병원의 재정 상황이 악화된 탓에 병원 측에서는 정략결혼과는 별개로 바이오 사업이라도 추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장한국 박사는 점점 더 깊은 고민에 빠졌고, 문제의 해결책은 단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가연만 없으면 돼. 아이만 流産(유산)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장한국은 교묘한 계획을 세웠고, 가연을 출근길에 사고로 위장해 해치려 했다. 그는 차를 몰고 가연의 뒤를 쫓아 병원 근처에서 사고를 일으키려 했지만, 가연은 우연히 뒤를 돌아보며 그의 차량을 발견했다. 순간적인 직감으로 가연은 재빨리 움직여 위기를 피했지만, 그 과정에서 복부에 통증을 느끼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검진 결과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다. 하지만 가연은 이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며칠 후, 가연은 장한국을 찾아갔다.
"박사님, 그날 사고가 당신 짓이었죠?"
장한국은 그가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쩔 수 없었다. 병원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 아이는 태어나선 안 돼."
가연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에게 아이는 당신의 병원보다 더 중요해요. 그리고 이 아이는 태주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예요. 당신도 어쩌면… 내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거 알죠? 하지만 난, 당신을 고소하지 않을 거예요."
장한국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놀라며 물었다.
“법정고소 라니?”
“이번 사고는 당신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당신을 고소할 수도 있어요.”
“그 당시 너희 엄마는 서로가 원해서 하룻밤을 보냈고 생각지 못한 임신으로 나를 찾아와 상의 없는 통보를 하고 지금 와서 고소라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니?”
“이유가 어떻든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찾았을 때도 당신은 모른다고 했다죠, 한 생명을 두고 아버지로서 그보다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 그 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 자신의 인생에 쭉 오점이 될까 봐 안부를 묻지도 찾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한 생명은 이제 당신 앞에 왔네요, 그래도. 부정하고 모른다 하세요. 여기 유전자 검사결과도 함께 있으니 보시죠.”
“그때 그 마음이라면 저를 죽이고 싶으시겠지요, 어디 말씀해 보세요.”
따지며 가연은 침착하게 말했다.
“저도 생물학적 아버지도 아버지니까 말씀드리죠, 저는 홀몸이 아닌 것 아시죠, 단 아버지가 저를 도와 모든 것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저를 도와주시면 기회를 드릴게요.”
“태주와의 결혼을 방해하지 마시고 도와주신 다면 저도 양쪽에서 추진 중인 바이오 사업을 적극 도울 것입니다. 협조를 못 하신다면 그다음은 저도 어떻게 할지 모르니 대답 기다릴게요.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장한국은 가연의 말을 듣고 멍해졌다. 그녀의 말속에 숨어 있던 진실이 그를 당황하게 했다.
"너… 네가 그걸 알았구나. 언제부터?"
"오래전부터 알았어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당신이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가연은 자리를 일어서 나왔다.
나라병원은 경제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외딴섬 의료 봉사를 준비했다. 대한과 가연은 의료진으로서 오지의 환자들을 돕기 위해 떠났다. 태주는 내심 가연의 임신을 걱정했지만, 가연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걱정 말아요. 잘 다녀올게요."
가연은 대한의 호의적인 관심에도 냉정하게 선을 그으며 일주일간의 봉사를 마쳤다. 하지만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병원은 감염병으로 인해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의료진 모두가 감염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분주했다. 그 가운데 대한은 위험을 무릅쓰고 가연을 보호하려다가 자신이 감염되고 말았다.
대한은 마지막까지 환자들을 돌보았지만, 끝내 감염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병원은 그의 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 대한은 가연에게 말했다.
"가연,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어. 내가 없더라도 당신은 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가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대한, 당신의 용기와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갈게…."
대한의 죽음은 가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말은 가연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가연은 그의 죽음을 통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가연은 태주와의 안정된 삶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병원에서의 경험과 스승인 백운 선사의 가르침이 그녀에게 힘을 주었고, 이제 가연은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게 되었다.
장대한의 죽음 이후, 나라병원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원장 박영심과 장한국 박사는 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지만, 병원의 일상은 여전히 바쁘게 흘러갔다. 직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을 통해 일을 이어갔지만, 어수선한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태주는 가연을 깊이 사랑했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음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가연의 손을 잡으며 그녀와의 관계가 스파크처럼 뜨겁고 강렬해지기를 바랐지만,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연 역시 자신이 너무 큰 슬픔에 빠져 다른 사람의 감정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만을 쳐다보며 태주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것을 알았다.
가연과 태주는 저녁을 마친 후, 근처 공원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태주는 조심스럽게 가연에게 말했다.
"가연 씨, 어머니께서 당신을 이해하시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할 거예요."
가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우리 사이가 이 상태로는… 힘들어요."
태주는 가연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함께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당신 곁에 있을게."
그 말에도 불구하고, 가연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는 태주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자신의 슬픔과 고뇌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대화는 사랑과 결단의 순간을 담고 있었지만, 여전히 가연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녀는 태주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지만,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장대한의 죽음은 가연과 태주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들의 사랑을 깊게 하거나 단단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를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