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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포포 Feb 09. 2021

아빠는 무슨 일 하시니

나는 아빠의 직업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

다시 들춰보기 싫은 기억이지만 그럴수록 선명하게 빛이 비치듯 그 날이 떠오른다.


5학년 담임선생님은 이제껏 만났던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때에, 우리 담임선생님은 꽤나 공정했고, 모두가 비슷한 빈도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랬던 담임선생님이 그날 1분단부터 돌면서 하신 똑같은 질문은 어쩐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부당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빠는 무슨 일을 하시니?"


아마도 선생님의 자의에 의한 조사라기보다는, 학교 운영과 행정상 필요한 조사였기에 그랬으리라. 평범한 질문이 어쩐지 나는 불편했다. 내가 앉아있는 4분단으로 가까워질수록 나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연구원이요, 한전에서 근무하세요, 선생님이세요. 보통은 누가 들어도 명확하게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있는 직업들이 아이들 입을 통해 전해졌다.


아빠는 개인용달 기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코로나19 소상공인 지원금을 받는 영세자영업자다. 그때는 '사업자등록'도 '소상공인'도 '자영업자'라는 단어도 몰랐다. 나는 저 여섯 글자를 뭐라고 포장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이 단어 저 단어를 찾아서 분주했다.


드디어 내 앞에 선생님이 섰을 때,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니?"라는 질문에 새하얀 머릿속에서 "운수요."라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응? 온수?"

(나는 그냥 회사원이라고 말했어도 무방할 질문에(대체 왜 이런 조사를 할까, 다음번에 연봉을 적어내라고 할런가?) 12살 나름의 진지한 고민 끝에 개인용달 기사, 트럭 운전사, 운전기사의 최상위 카테고리가 될 법 한 '운수*'를 떠올렸을까.)

*운송이나 운반보다 큰 규모로 사람을 태워 나르거나 물건을 실어 나름.


나의 대답을 한 번에 못 알아들은 선생님보다 아이들의 반응에 나는 비참함을 느꼈다.


"온수? 뭔데 때밀이가? (앞에 앉은 부반장과 그 짝지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온수 말고, 운수요 운수, 개인용달 운전하는 기사요."


그 순간 40여 명의 반 아이들 시선이 다 내게 향하는 것 같아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냥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40명의 아이들의 관심사는 내가 아니었는데, 낮은 자존감에 불을 짚이듯 모든 이의 시선을 착각하고, 태연하게 넘기지 못했을까.


그때의 아빠 나이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를 키워보니, 학교 선생님들의 가장 중요한 학기 초 업무가 아이들의 가정 환경 파악임을 알게 되었다.

(한부모가정, 결손가정, 혹은 드러나지 않는 가정폭력 등, 선생님은 아이의 영양상태, 발육상태, 사회성, 단순하게 어떤 옷을 입고 오는지(계절감이 없는 옷차림 하고 온다든지), 손톱, 안색, 헤어 컷 등 모든 것을 파악해서 그에 맞춰 적절한 지도편달을 해야 한다.)


내 기억 속 그 장면처럼 직설적이고 무안을 주는 방법을 취하지는 않지만, 스스로의 빈곤함과 가난을 적극 증명해야 한다는 점(주민센터, 소위 거주지 동사무소에 들려서 차상위계층 등의 증명서류를 발급해 제출해야 한다)에서 어쩌면 내가 겪은 비참함을 요즘 아이들도 공유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빠를 생각하면, 그런 부끄러운 감정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버지가 부재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고맙다.(안도감을 느낀다)


실제로 대학을 다니며 동기들의 부친상 소식을 접하며, 이렇게 이른 나이에 아빠가 부재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함께 말없이 애도하며 슬픔을 엿보았을 뿐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환갑이 지났지만 아빠는 여전히 일을 하고, "대목이라 엄청 바쁘다." 하며 자랑처럼 이야기하신다.


아빠는 우리가 없는 집에서도 여전히 가장 노릇을 하며 아침이 되면 일터로 나가고 해가 지면 몇만 원이 채워진 지갑을 품에 안고 돌아온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그를 모르는 철없는 자식만 있을 뿐.


코로나19로 가족이 다 모이기 힘든 명절이 되었다. 주말을 이용해 살짝 들렀더니, 엄마는 산에 오르고 없고, 빈 집을 아빠 혼자 지키고 있다.


"엄마는? 주말인데 아빠 혼자 뭐 하고 있었어요?"

"아빠는 바쁘지, 2층에 공사하고, 1층 바닥에 방수칠 했다."


"역시 아빠가 우리 집에서 제일 바쁘네. 명절이라고 떡국떡 하고 모둠떡 갖다드리러 왔어요, 새해도 건강하세요."


거실에 앉으니 동장군이 엄호하던 겨울이 다 가고 오후 4시의 지는 햇살이, 마치 오지 않은 봄의 얼굴을 살짝 보여주는 것 같다. 따뜻한 오후다. (Photo by Erik Aquin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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