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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중 Aug 07. 2022

오랜만에 올리는 글

그동안 브런치를 쓰지 못했던 이유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은 지가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확실하지 못했던 이유가 컸다. 영화와 문학, 잡다한 내 생각 등을 글로 쓰려는 마음과 또 누군가 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이 브런치를 시작했었다. 다만 이곳에 글을 쓰다 보니 생각에 몇 가지의 변화가 생겼다.


일단 나의 글을 굳이 여기에 써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었다. SNS에 짧은 글을 올려도 되는데 더 큰 노력이 드는 브런치를 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나 자신이 글쓰기와 조금 멀어진 탓도 있었다. 요즘은 시를 쓰지도 않고 평론을 하고 있지도 않다. 일에 치이고 다른 일상에 빠져 글쓰기를 놓았다.


그런데 대뜸 다시 글을 쓰는 이유는 혼란 때문이다. 이수명 시인은 시는 혼란에서 온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모든 글쓰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이 혼란은 나를 비롯한 우리 세계 전체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 혼란을 발견하기까지 세 명의 중요한 인물을 만났다. 프레드릭 햄튼과 앨버트 허쉬만, 그리고 어빙 고프만이다. 한 명의 사회운동가, 한 명의 경제학자 그리고 한 명의 사회학자를 통해 나는 우리 사회가 정어리떼와 같다고 생각했다.


정어리떼는 마치 거대한 물고기처럼 집단으로 뭉쳐서 생존을 꾀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이타적인 행동의 결과가 아니다. 다수가 하나로 뭉침으로써 다른 개체가 잡아먹힐 가능성을 높여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는 이기심의 결과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닮아 있다.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기 된 것은 바로 이 ‘정어리떼 자본주의’를 말하기 위해서다. 프레드릭 햄튼은 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 이타심의 집단을 만들고자 했고. 앨버트 허쉬만은 ‘이탈’과 ‘경쟁’이 사회를 어떻게 약하게 만드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어빙 고프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회 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 왜 힘든지 생각했던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정어리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으로의 글은 결코 자본주의에 대한 것이 아닌 우울과 고통에 대한 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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