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이 문장은 서정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시구다. 서정주의 친일 행적만큼이나 이 시구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인의 과오를 떠나 위 시구는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저 시구를 볼 때마다 ‘바람’의 의미를 공기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타인의 욕망으로 생각했다. 흔히 ‘바램’이라고 쓰는 ‘바라다’의 명사형 ‘바람’ 말이다.
어릴 적부터 가난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야 했던 막내로서 나는 금세 애어른으로 살아야 했다. 남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마음은 심장 깊이 새겨졌다. 부모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바람에 따라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 삶이었다. 나를 키운 것은 말 그대로 ‘바람’이었다.
자크 라깡은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을 남겼다. 바람을 대하는 내 태도가 그랬다. 남의 인정을 받는 것이 내 욕망의 기준이 되고 삶의 길이 됐다. 나는 남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서는 것이 탁월한 삶이라고 여겼다. 비단 나뿐만일까.
처음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스무 살 무렵, 진짜 내 삶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나는 교회를 떠났고 남이 세운 기준에서 벗어나 내 도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른을 훌쩍 넘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지금은 ‘진짜 내 삶’ 자체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
“사는 법을 배운다는 것, 그것을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혼자서 배운다는 것, 자기 자신에게 사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자에게는 불가능한 것 아닌가? 이는 논리 그 자체가 금지하는 것 아닌가? 산다는 것은 말뜻만으로 볼 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아니며 삶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삶이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타자로부터,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어떤 경우든/어쨌든 타자로부터 삶의 가장자리에서, 내적인 가장자리 또는 외적인 가장자리에서, 그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에 의한 교육인 것이다” -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진태원 옮김) 서문 중에서 -
지금까지 나를 키운 것 중 8할이 바람이라면 앞으로 8할은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자크 데리다는 죽음이 그 답이라고 전했다. 나의 죽음, 그리고 타자의 죽음에 비추어 삶을 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사는 나 자신에게 호통치는 말로 이해했다. 죽음 앞에서 나는 내 삶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또 이미 앞서 간 이들이 볼 때 나는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다만 내가 이해한 것과 이를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여전한 괴리가 있다. 여전히 나는 여러 충동 속에서 후회하고 배회한다. 나를 흔드는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나마 이런 생각의 과정 속에서 얻은 결론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특별하면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타자 앞에선 모두의 생명은 특별하고 자신의 삶은 남들과 다를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특별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에게 부여한 예외성을 지우는데 서른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세상에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생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러나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특별하지 않다. 권력은 화무십일홍과 같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 임무를 다한 것이 아니다. 먼저 앞서 간 동료들의 죽음으로부터 삶의 방향을 정했기에 그 임무를 다했다. 특별함은 거기서 나온다.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비추는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