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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중 Feb 13. 2021

울음을 참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시

걸음을 멈추게 하는 시 한 모금

시작은 코스모스

     

낮보다 밤에 빚어진 몸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병이 비치는 피부를 타고났다     


모자 장수와 신발 장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끔은 갈비뼈가 묘연해졌다

죽더라도 죽지 마라

발끝에서 솟구쳐

     

사랑은 온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나의 바지다

나도 죽어서 신이 될 거야

그러나 버릇처럼 나는 살아났다

     

검은 채소밭에 매달리면

목과 너무나도 떨어진 얼굴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진 국기처럼 서로 마주 봤다

     

멀리서부터

몸이 다시 시작되었다

     

젖은 얼굴이 목 위로

곤두박질쳤다

- 유계영, 「시작은 코스모스」, 『온갖 것들의 낮』, 민음사, 2015


  우리는 종종 내가 내 몸에서 떨어져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마치 시의 화자처럼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자기모순을 깨달을 때 말이다. 그럴 때마다 "모자 장수와 신발 장수 사이에서" 태어난 것처럼, 자신의 중심을 의심하는 사람이 되곤 한다. 자기부정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게 하고, "사랑은 온몸을 필요로 하지 않"다며 나뿐만 아니라 다른 상대도 부정하게 만든다.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타인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나를 모두 부정해서 신이 될 것처럼 죽여 없애려 해도, 아침이 되면 부질없는 자기 위로로 "버릇처럼" 살아나는 것이 현실의 삶이다. 그러나 애매한 부정보다는 끝까지 말고 나가는 진실한 자기부정이 나을 때가 있을 것이다. "검은 채소밭에 매달리"듯 나는 나가 아니라는 듯 떨어지다 보면 시의 화자처럼 나를 마주 볼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후회 없이, "젖은 얼굴이 목 위로/곤두박질"치듯 울다 보면 우리는 그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울음으로부터 이 시집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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