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필수 Aug 09. 2021

자기를 알면 자책하지 않는다

우리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최근에 딸을 잃은 한 어머니가 심한 우울과 마음의 고통을 호소했다. 한때 사업에 성공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자기 딸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딸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 것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딸을 보낸 엄마는 절망으로 무너져 내렸고,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며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처럼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과의 사별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환하게 웃으며 나타날 것 같은 그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프고 안타깝다. 활기찼던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깊은 마음으로는 사랑하면서도 겉으로 표현을 잘 못했던 분이 돌아가시면, ‘왜 그때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했을까?’, ‘왜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못했을까?’ 후회하며 자책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심한 질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경우에는 그 병을 치료해 주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질책하게 된다.



더 심한 경우로, 친한 사람이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의지처가 되어주지 못한 자신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미안한 감정은 그런 결과를 가져온 자신에 대한 분노가 되기도 한다. ‘바보 같은 놈! 왜 그렇게 밖에 못했던 거야?’, ‘그런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다니!’‘결국 네가 그 사람을 죽게 만든 거야!’이렇게 심하게 자신을 책망하고 공격하는 것이 지속되면, 자신감을 잃고 무력감과 우울에 빠진다.



문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은,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운 마음에서 시작된 자책감이 자신을 우울의 늪으로 몰아넣어 좌절과 무기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과거에 이미 벌어진 일을 벌어지지 않은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건을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이다. 같은 교통사고를 겪어도 어떤 사람은 심각한 트라우마가 발생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가 생긴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교통사고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트라우마는 사라진다. 이처럼 생각이 바뀌면 지나간 일에 대한 느낌도 바뀌는 것이다



자책감을 느끼는 그 일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상황을 이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일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이전보다 더 좋게 바뀔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더 좋은 상황’으로 반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라도, 최소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는 일 중에 결과를 완벽하게 보장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열심히 공부를 할 수는 있지만, 합격을 보장할 수는 없다.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자녀를 갖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업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도중에 어떤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해서 기대했던 일이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



우리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도 있다.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 벌어지지 않을 일은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도 그렇다. 그것은 어떤 위대한 존재가 오더라도 손쓸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하는 생각도 이제서야 겨우 떠오르는 것이지 그 당시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가 잘못한 것 같아도, 그 당시 나로서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오늘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일도 훗날 큰 실수라고 판단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생각으로 산다. 자기 마음에 형성된 생각의 흐름이 그 사람의 운명이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도, 건강과 질병도, 심지어는 삶과 죽음도 자기 생각에 따라 결정된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기도 모르게 형성된 것이라서,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친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도와주지 못해서 안타깝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그 사람의 무의식에 형성된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에 정말로는 미안할 게 없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신이시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모두 더 큰 의식의 힘에 따라 사는 것이다.



지금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해하는 본인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누구도 예외 없이 육체적인 삶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삶이 전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의학자들도 이 사실을 인식하고 과학적으로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의학계에서 줄기세포 최고 권위자인 로버트 란자 박사는 “물질우주는 의식적인 관찰자가 창조하는 것이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버드 의대 신경정신과 의사인 이븐 알렉산더는 “인간의 의식은 육체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진정한 삶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에도 그 대륙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과학자들이 발견하기 전에도 인간의 본질이 ‘의식’이라는 진리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이를 먼저 발견한 위대한 선각자들이 수천 년 전부터 우리가 ‘영원한 영적 존재’라고 가르쳐 온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겉으로 드러난 육체는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육체적 죽음을 맞는다 해도, 그 사람의 생명은 몸이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존속한다. 우리의 본질인 생명은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언제나 기쁘고 평화로 상태로운 존재한다.



이것을 알면 돌아가신 분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슬퍼할 일이 없다. 오히려 그분의 본질인 위대한 생명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고 그분을 축복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나 죄책감도 사라진다. 진짜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면,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자책하는 마음도 사라지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