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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진채 Feb 14. 2024

‘우리’라는 무리

오랜만에, 그래 정말 오랜만에, 지난,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세 계절을 오갔던 산책로에 나와봤다. 엊그제 구정이 지났고, 우수(雨水)가 19일이라니 이제 겨울은 그 고비를 넘긴 게 맞다.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바람이라도 쏘일 겸 나왔다.   

  

내가 크게 앓았던 건 모두 다 겨울이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는다. 응급실에 실려 갈 때를 포함해서, 병원에 입원한 때가 모두 다 겨울이었기에 나는 의도적으로 겨울을 회피한다. 그래서 눈이 두어 번 내린 후에는 가능하면 밖에는 안 나돈다.   

  

걸을 때마다 항상 쉬던 그 벤치에 앉아 있다. 이 쉼터를 오갈 때 수도 없는 노인을 만났지만, 딱 한 번 이야기를 나눴던 노인 한 분이 생각난다.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은 분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겨우 반백이어서 늙은이라는 실감은 없었다. 나보다 먼저 와 앉아 계시던 분이다. 나는 낯을 가리는 성질이어서 초면에는 아는 척을 안 하는데 어쩌다 그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주 조용한 성격이라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는데 의외로 말할 상대로 내가 반가웠던 것 같다. 내게 묻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사람과 마주할 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분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젊었을 때는 사업을 했었다고 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그 빚을 감당할 수 없어서 죽음을 시도한 적도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요즘은 몸이 안 좋다고도 했다. 큰아들 집에 얹혀살고 있는데, 할멈은 3년 전에 먼저 갔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그냥 혼잣말처럼 한다. 나란히 앉아 있어서 그분이 내 얼굴을 쳐다봤는지는 알지 못한다. 느낌으로는 내가 곁에 앉아 있다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조용하게 일어나 말도 없이 슬그머니 가버린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낯설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때 내가 생각한 것은, 내가 갈 방향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는 그 뒤를 따라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곁을 지나서 앞설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늙은이에게는 길동무도 없이 지나온 세월이 적잖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앉아 있었다. 

     

그날, 한참을 더 앉아 있다가 갈 길을 단념하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그분은 지금도 안녕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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