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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케이트 May 03. 2024

06. 종종 그들이 그리워진다-하

파리에서 만난 사람 중에는 마리와 에밀리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파리로 이사하고 나서 8구에서 살게 되었다. 방 세 칸이 있는, 파리에서 보기 드문 현대식 아파트였다. 40대였던 프랑스인 마리, 20대였던 법대 교환학생 이탈리아인 에밀리, 나와 같은 방을 썼던 한국인 친구 J가 내 룸메이트들이었다.

물론 그들과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문화가 다른 여자 4명이 한집에 모여 사니 얼마나 말도 많고 일도 많았겠나. 수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프랑스, 이탈리아인들이라 늘 우리는 시끌벅적했다. 방문 닫고 꼭 필요한 말만 하는 다른 셰어하우스와는 달랐다. 우린 제법 잘 지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관심이 많았던 마리는 늘 나와 J를 궁금해했다. J가 가져온 전기 밥통을 무슨 미래에서 온 문명인냥 신기해했고(“세상에 밥을 만드는 전기 기계가 있어?”), 토스트 사이에 잼과 달걀후라이를 함께 넣어 먹는 것도 신기해했다. 

“달달한 잼과 소금기가 있는 달걀이라니?” 

“단짠단짠 조합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리고 에밀리는 토스트 하나를 반으로 잘라 한쪽에는 땅콩잼을, 다른 쪽에는 딸기잼을 발라 먹었다. 난 그런 조합은 또 처음 보는지라 아주 유심히 관찰했다. 우리의 식탁은 언제나 이렇게 풍성했다.


아침에 아침잠이 없는 마리가 가장 먼저 눈을 뜬다. 그리고 커피와 불로 오랜 시간 단련이 된 낡은 모카포트에 커피 가루를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커피 향이 적당히 주방을 덮을 즈음 J와 내가 일어난다. 우리는 주로 토스트를 먹었지만, 가끔은 J가 잘 만드는 카레 라이스를 해먹을 때도 있었다. 8구라는 동네가 다양한 인종이 사는 동네라(인도 음식점도 많다) 마리도, 에밀리도 개의치 않았다. 마리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늘 우리의 음식을 탐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내 에밀리가 눈을 떴다. 그녀는 늘 늦었다며 아침을 거르고 뛰어나가기 일쑤였지만, 느긋한 주말 아침은 우리의 식탁에 동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평화로운 장면이다. 주방의 창문으로 따사로운 햇살과 적당한 바람이 들어오고, 각자 앞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어제 있었던 일이나 연애 사건에 대해 떠드는 우리의 모습. 앞으로 다시 없을 순간이다.      


마리는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당시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고 싶은 의욕과 의무로 가득 차 있던 내게 마리의 삶은 때때로 한심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녀에게 가장 잘 맞는 삶이었을 것이다. 

뚜렷한 직업 없이 어떤 날은 바에서 맥주를 내어주고, 또 어떤 날은 박물관 매표소를 지켰지만(길게 하는 일은 없었다), 전혀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충분히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마리 때문에 나 또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 나에게는 참 고마운 사람이다. 마리와 함께 클럽이라는 데도 처음 가봤고(가무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클럽에 간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시낭송회라는 데도 처음 가봤다. 한국에는 거의 없는 공연(?)인데, 작가가 직접 자신의 시를 읽어주면 사람들이 매우 진지하게 경청한다.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게 더더욱 신기했다. 그리고 마리가 박물관에서 일할 땐 공짜로 관람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리가 아니었다면 절대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유학생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결국 학교에서 만나는 반 친구나 교수들이 대부분인데, 마리 때문에 방송국에서 일하는 피디도 알게 되었고, 화가의 집에도 놀러 갔다. 그리고 클럽에서 공연하는 밴드의 멤버들과도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 모두가 마리의 친구들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직업군들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마리의 살아온 인생이 보이는 듯 했다. 

왕성한 호기심과 편견 없는 태도로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 마리의 가장 큰 장점이자 배우고 싶은 부분이다. 하지만 때때로 이런 장점이 과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아침에 일어났는데, 집 안 구석구석 퀴퀴하고 오줌 냄새 같은 게 배어 있었다. 무슨 냄새지? 화장실에 문제가 있나? 하는 순간 마리의 방에서 거의 노숙자 수준의 위생 상태를 자랑하는 남자가 나왔다. 몇 달을 감지 않았는지 레게 머리는 떡지다 못해 굳어 있었고, 옷 역시 원래 색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때가 묻어 있었다. 말 그대로 그냥 비렁뱅이 같았다.

오 마이 갓! 도둑? 강도?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나에게 급하게 눈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때 마리가 벗은 몸에 이불을 둘둘 만 채 나왔다. “내 친구야” 쿨하게 말하고 욕실로 들어간 마리. 마리도 냄새가 신경 쓰였는지 평소보다 오랫동안 샤워를 하더라. 그리고 나오자마자 집 안 곳곳을 환기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그 뒤에도 몇 번 마리의 방을 노크했다. 그가 다녀간 다음 날은 식구들 모두 집 안 곳곳을 환기하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다. 창문을 열고, 향초를 피우고 난리를 치는 와중에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40대의 싱글녀. 외롭고 남자 품이 그리운 건 알겠는데, 그래도 하룻밤 상대로 ‘꼭 이래야만 했냐!’. 이럴 땐 편견을 좀 가지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론 마리는 그 남자와 사귀진 않았다. 그냥 ‘잠만 자는 사이’였다.     


마리에 비하면 에밀리의 연애담은 귀여웠다. 에밀리의 아버지는 변호사다. 하지만 에밀리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그냥 평범한 유럽의 20대였다. 귀하게 자란 티라고는 전혀 나지 않았다. 유럽의 평범한 대학생들처럼 거의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녔고, 돈도 꽤나 아끼며 살았다. 심지어 방을 뺄 땐 온갖 빨래를 다 하고 갔다. 이사 가는 집에 세탁기가 없다나. 


그런 그녀에게는 두 남자가 있었다. A는 어렸을 때부터 에밀리와 함께 자라온 베스트 프렌드이자 남자 친구였다.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한 케이스다. A는 사랑을 따라 에밀리와 함께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왔다. 여기까지는 참 로맨틱한 스토리인데, 사랑이 그렇게 로맨틱하기만 하면 재미없겠지. 그때 치명적인 훼방꾼이 나타났으니. 그는 바로 모델 뺨치게 잘생긴 B였다. 에밀리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서 B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이후 세 사람은 절친처럼 붙어 다녔다. 낯선 사람들투성이인 타국에선 같은 동포라는 이유만으로 금방 친구가 되기도 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에밀리가 B에게 반했다는 거다.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외모이긴 했다. 한번은 우리집에 놀러왔는데, 홀에서 마주친 나도 ‘헉’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패션지에 나오는 모델 같았다. 게다가 친절했다! 

못생긴 남자도 매일 보면 정이 드는 판에 모델 포스 풍기는 남자는 오죽할까. 


한번은 B 혼자 우리집에 왔다. A 없이! B는 그날 밤 에밀리 방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아파트를 떠났다. 그날도 마리와 J, 그리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리가 끓여준 커피를 한 모금할 때 즈음 에밀리가 부엌에 등장했다. 우린 일제히 에밀리를 쳐다봤다. 에밀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자리에 털석 앉았다. 


수다쟁이 에밀리는 우리가 물어보기도 전에 말을 쏟아냈다. “아무 일도 없었어”라고 탄식하듯 내뱉더니 어제의 이야기를 전했다. B는 어디서 놀다가 지하철이 끊어졌다며 에밀리 방에서 하룻밤을 청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B는 에밀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바닥에서 얌전히 잠만 자더란다. 그리고 다음날 지하철 첫차 시간에 맞춰 아파트를 나간 거였다. 에밀리는 내심 B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자신에게 아무 짓도 안 할 수가 있냐고 몇 번이나 볼멘 소리를 냈다.


그런 에밀리가 귀엽기도 하고, 상황이 웃기기도 해서 우리는 에밀리 눈치를 보며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다혈질인 에밀리의 성격을 아는지라 밤새 뒤척이며 B의 눈치를 살폈을 상황이 상상이 되었다. 시트콤도 그런 시트콤이 없었겠지.


물론 그 이후에도 에밀리와 B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에밀리와 A도 무사히(?) 연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B가 A와의 우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지, 아님 에밀리가 자신의 타입이 아니라서 거리를 유지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끔 B가 집에 놀러 올 때마다 그를 더 유심히 지켜보게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에밀리의 삼각(?)관계는 한동안 우리의 단골 식탁 메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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