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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케이트 Jun 18. 2024

13. 친애하는 나의 도시, 도쿄-하

도쿄는 내가 가장 많이 간 해외 도시라는 점 외에도 혼자 여행한 최초의 도시라는 점에서 나에겐 의미가 크다. 파리는 살러 간 곳이니까 제쳐두고 처음으로 혼자 여행한 도시가 도쿄였다. 또 다른 K팝 그룹 취재차 도쿄에 갔다가 일정이 끝나자마자 휴가 모드에 들어갔다. 회사에는 이미 말해둔 터였다. 취재가 끝나면 여름휴가를 갔겠노라고. 


3박 4일 정도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내가 한 건 휴식이었다. 이미 출장과 친구와의 여행 등으로 서너 번은 방문했던 터라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숙소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예전에 갔던 곳을 재방문하며 느리게 느리게 걸어 다녔다. 대신 더 많이 관찰을 했던 것 같다. 사진을 많이 찍자, 딱히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닌데 자세히 보다 보니 많은 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셔터를 자주 눌러댔다.


당시 나에겐 아주 오래된 필름 카메라가 있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사진관을 하셨는데 그땐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대여하는 일도 했다(그 시절엔 카메라가 없는 집이 많았다). 그래서 집에 크고 작은 필름 카메라가 몇 대 있었다. 

사진관을 접으시면서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 한 대만 남겨두시고 다른 것들은 모두 처분하셨다. 우리 집의 유일한 카메라는 크면서 내 차지가 되었다. 아버지도 더 이상 사진 찍는 일을 즐기지 않으셨고, 동생은 이런 데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 무거운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난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귀찮은 건 질색하는 내가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닌 걸 보면 그 시절 난 꾀나 사진에 열정이 뻗쳐 있었던 것 같다. 


현지인의 삶에 관심이 많은 나답게 그 시절 사진들을 보면 거의 사람들 사진이다. 누구는 바다를 찍으러 다니고, 누구는 산을 찍으러 다니는데, 나는 사람을 찍으러 다녔다. 아니 사람이 있는 풍경에 나도 모르게 셔터가 눌러졌다고 해야겠지. 카페에서 친구와 수다 떠는 꽃소년들. 장발에 멜빵바지를 입고 있는 독특한 패션의 아저씨. 장난감 가게 앞에서 야무지게 빵을 먹고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꼬마 등. 

그때 찍은 사진들은 몇 년 뒤 출간한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론 그땐 내가 여행 산문집을 쓸 줄도 몰랐고, 당연히 그때 찍은 사진들이 책으로 나오게 될 줄도 몰랐다.


그때 난 시부야, 롯폰기를 자주 갔다. 숙소는 신주쿠에 있었다. 처음 한 혼자 여행인데 다행히 친절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첫 여행이 좋지 않았다면 그게 트라우마가 돼 다시는 혼자 여행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준 좋은 추억들 때문에 나는 다시 캐리어를 끌고 집구석을 나설 수 있었다.


이틀째였나, 롯폰기의 쇼핑센터를 돌아다니다(윈도쇼핑을 좋아한다. 짐이 많아지는 게 싫어서 잘 사진 않지만) 북카페를 발견했다. 쇼핑센터 구석에 있어 별로 붐비지도 않았고, 나무로 된 인테리어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조명이 적당히 어두운 것도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처음엔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 커피나 한잔 하자 싶어 들어갔는데 친절한 직원 덕에 긴장이 풀어졌다. 


생각해 보면 여행 중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카페나 식당에서 뭔가를 주문하는 때이다. 주문하는 방식이야 어디든 똑같겠지,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참 미묘하게 다르다. 프랑스의 맥도날드에서는 ‘세트’를 ‘메뉴’라고 하고, 어떨 때는 세트에 당연히 포함돼 있는 음료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 줘야 할 때가 있다. 또 뒤에 줄이 길 때는 그 긴장이 배가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이 목이 빠져라 나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직원이 그냥 안 들려서 “네?”라고 말했을 뿐인데, 나는 내가 잘 못 말했나 싶어 진땀이 흐르고, 말을 잘하다가도 갑자기 백지가 되기 일쑤.


그날도 어쩌면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혼자 카페에 간 날이었을 거다. 며칠 전(출장 중에) 후배와 카페에 갔다가 실수를 한 경험이 있어 더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절한 직원이 나의 영어(발음도 안 좋은)를 찰떡같이 알아듣고(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세상에 그 음료를 정확하게 준비해 줬다. 그리고 “맛있게 드시라”라고 영어로 얘기해 주더라. 그게 뭐라고 기쁜지, 그의 영어를 내가 알아들었다는 사실이 더 기뻤던 것 같다.


그 카페는 또 다른 의미로 나에게 중요한 카페다. 거기에서 한동안 중단됐던 소설이 다시 써지기 시작했다. 그날 내가 가지고 간 수첩에 메모를 했었나(난 타국의 카페에서 여행 소감을 끄적이는 버릇이 있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여기서 글을 쓰면 잘 써지겠다고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다음날부터 난 그 카페로 출근했다.

막혀있던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남녀 주인공은 내가 걸었던 미드타운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고, 내가 들어가 볼까 했던 스시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예전에 왕가위 감독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그가 했던 말이 실감이 됐다. 그는 어떤 장소에 가면 이야기가 저절로 그려진다고 했다. 영화 ‘중경삼림’을 만들 당시(3주 만에 완성했다) 홍콩 뒷골목에 있는데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단다. 그때 떠오른 몇 개의 장면으로 촬영이 시작되었고(무려 시나리오도 없이!), 이야기는 편집을 하며 완성되었다. 

그땐 그 감독이 천재인가 했는데, 이 여행에서 난 장소가 강한 영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작가들이 그렇게 여행을 다니나 싶다. 


물론 하루종일 글만 쓰지는 않았다. 롯폰기 근처 극장에도 갔고, 도쿄에 갈 때마다 방문하는 도쿄 국립 신미술관에도 갔다. 거기서 유명 인상파 화가의 전시회도 만났다.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동네를 산책했다. 롯폰기 주변은 길도 예뻐서 산책하기도 즐거웠다. 


그때 깨달았다. 관광 명소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며칠이라도 현지인처럼 살다 오는 게 나에게 맞는 여행이라는 것을. 그래서 난 게으른 여행자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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