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
아비정전을 봤어.
내가 좋아하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야.
알지? 네가 영화 추천해달라고 할 때마다 그 감독 영화를 언급했잖아.
전에 2-3번은 봤는데, 네가 ‘골 때린다’고 해서 다시 보게 됐어.
네가 왜 그런 표현을 했는지 궁금해졌거든.
근데 내가 잊고 있던 명장면도, 명대사들도 많았더라.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잊고 있었지?
왜 저렇게 가슴을 때리는 대사를 잊고 있었지?
죄책감마저 들었어. 왕가위 감독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오프닝 장면 생각나?
폭풍 같은 매점 신이 지난 후 타이틀 올라갈 때
야자수가 가득한, 초록색 장면이 나오잖아.
그때 흐르던 음악, 초록색 화면, 느릿느릿 움직이던 카메라 워크.
그 장면이 나오는데 가슴이 설레더라.
너무 좋아서 눈물 흘릴 뻔했어.
그리고 그 장면은 아비의 슬픔과 연결이 되지.
힘들게 찾아간 자신에게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던 친엄마.
‘나도 절대 그녀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말하며
돌아서서 걷던 아비.
그의 고집스러운 등이 언젠가 내 모습 같기도 했어.
야자수 숲길을 분노에 찬 등을 보이며 걷던 아비,
날 설레게 했던 그 음악은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 됐지.
그 장면 참 아름다우면서도 슬펐어.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공감해주는 네가 있어서 난 또 기쁘기도 했어.
이런 대화가 참 아름답게 느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