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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an 12. 2023

현주

사랑했지만 by 김광석

방파제 어귀의 콘크리트 방벽(防壁)에 휘갈겨 놓은 글씨에 홀린 듯이 눈길이 간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얼른 바닷가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자마자 서둘러 운전대를 아내에게 맡겼다.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다가 몸을 돌리는데, 아침부터 찌뿌둥하던 몸은 웬걸, 오히려 마음까지도 홀가분해졌다. 주머니 속에 완충(完充)해 둔 인이어(in-ear) 이어폰이 마침 생각나 휴대폰과 페어링을 하니 때맞춰 들려오는 김광석의 '사랑했기에'가 첫 소절(小節)부터 애절하게 머릿속을 울린다.


사실, 김광석 노래가 그가 죽고 나서부터 더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살아생전의 김광석을 지금처럼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느 인가 익숙한 가락에 실린 가사가 구절구절 귓속으로 후벼 들더니, 어느 순간부터 김광석의 구성진 음색과 조화를 이루어 심금(心琴)을 울리는 절창(絶唱)이 되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그랬다. '현주'라고 흘려 쓴 두 글자가, 다시 말해, 날카로운 쇠붙이로 콘크리트 방벽에다 가슴을 후벼놓은 듯 아로새겨진 두 글자가 김광석의 노래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 어울리자 그 누군가가 남겨놓았을 외눈박이 사랑에 눈이 밟혀 그만 마음이 맥없이 무너졌다.


길을 가다가 흔히 보는 낙서 글은 보통 '현주야 사랑해 ♡'라든지, '맹구 ♡ 현주'와 같이, 현주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누군가의 심정이 글 속에 속속들이 나타나 거나,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밝혀 현주의 인이 맹구임을 만천하에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내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방파제 콘크리트 외벽에 깊숙이 긁어서 후벼 파 놓은 달랑 두 글자, '현주' 뿐이다.


우선 마음속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놈! 진짜 짝사랑이구나!'였다. '현주야 사랑해!', 혹은 '현주야 좋아해!' 따위의 말보다는 울림이 훨씬 큰, 하지만 이름 두 글자만을 새겨 넣을 때는 현주가 그 자리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어느 간 큰 놈이, 사랑하는 연인을 바로 눈앞에다 두고 달랑 이름 두 글자만 객쩍게 남겨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현주'라는 두 글자를 맞바람조차 거칠기 짝이 없는 단단한 콘크리트 외벽에다 몰래 흘려놓은 놈이라면, 이 놈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가슴에도 끝이 깔깔한 대못으로 못을 박듯 짝사랑 여인의 이름을 은밀히 남겨두었으리라.


김광석의 노래가 속절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고 다가설 수도 없으니 짝사랑이고,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없으니 이 또한 외사랑이다. 눈물 한 방울 툭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 가슴 저린 외로움에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그려지는 이름, '현주'! 물기 머금은 방파제를 타고 물안개가 밀려오면 먼지처럼 흔적조차 없이 멀어 이름이기에, 그날, 눈물 같은 비가 종일토록 덧없이 쏟아졌을지 모를 일이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by 김광석


등대까지 줄곧 이어진 방파제의 외벽에는 정말 많은 인연들이 스쳐간 듯했지만, 하고많은 이름들 가운데서 현주는 오로지 방파제 어귀의 '현주' 뿐이었다. 그것도 이름 양쪽 옆, 그 어느 쪽으로든 짝을 맺은 흔적조차 없이 오롯이 '현주' 두 글자로만. 홀린 듯 눈길이 간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방파제 끝 빨간 등대 아래쪽에도 수많은 근사한 이름과, 이들 이름의 주인공들을 향한 열렬한 고백이 온사방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른 땡볕 아래 잉크물이 마른 듯 당장은 지워지지 않을 흔적들로 남았으니 이곳에 아로새겨진 이들의 사랑 역시 금방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마음 한쪽이 여전히 안쓰러운 것은 외톨박이 이름 '현주'를 처음 보았을 때 가슴속에 남은 깊은 울림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현주가 몇 사람 있기는 하다. 친구의 부인과 옛 직장 동료의 딸과 행정실 직원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자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점심 잘 먹고  이 무슨 멜랑콜리에 센티멘털이란 말인가. 몸이 허하니 마음까지 헛헛해지고 말았다. 돌아서 나오는 길은 방파제 쪽으로 일부러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끼룩하는 소리에 놀라 머리를 들어보니, 양 날개를 활짝 펼친 갈매기가 불어오는 맛바람에 사뿐히 몸을 싣고 있었다. 덩달아 내 마음도 한결 더 가벼워졌다.


사랑했지만 by 김광석 》

https://youtu.be/ZZEv8ZB6G_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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