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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Feb 09. 2023

날씨 같은 인생

어제저녁 잠들기 전, 미리 일기예보부터 확인을 했다. '어제저녁'이라고는 했으나 두시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으니 '오늘 이른 새벽'이라고 표현해야 마땅하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는 어제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그냥 '어제저녁'으로 글을 시작하려고 다.


뜬금없이 일기예보를 먼저 들먹인 것은 지난해 가을 이후로, 하루라도 빼먹지 않고 달아서 닷새 이상 바닷가를 산책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이 한번 호되게 아프고 난 이후로는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거나 날씨라도 차가우면 혹시 폐렴이 재발될까 봐 부득불(不得不)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날이 완연하게 풀린 지난 일요일부터 바깥나들이를 슬슬 시작했는데, 예상밖으몸의 컨디션이 많이 올라와서인지 오늘까지 매일 만 오천보 이상씩을 걸었어도 몸에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아침, 눈을 뜨자마자 베란다 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잔뜩 흐려 있긴 해당장은 비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아침 겸 점심으로 오랜만에 돈가스를 먹기로 했다. 영일대해수욕장 근처에 '윳쿠리(ゆっくり)'라는 일본식 돈카츠 집이 개업을 해 포항 젊은이들이 요즘 많이 찾는 맛집으로 소문이 났는데, 열한 시 반에 오픈을 하고 나면 이내 만석(滿席)이 되고 말아 부득이 웨이팅까지 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윳쿠리는 '천천히', '느리게'란 의미를 가진 일본말인데, 일부러 10여분이나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갔는데도 우리보다 먼저 온 두 팀이 이미 선주문을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스카츠와 히레카츠를 섞어 우리 가족 세 명이 먹을 메뉴를 주문하고는 조리에 바쁜 가게 주인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는데, 주인의 얼굴이 몹시 눈에 익었다. 지난 나흘간 바닷가를 산책하던 중에 만난 젊은 사람바로 조리대 앞에서 돈카츠 만드는 일에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닷가를 걷다가 우연히 눈에 띈 젊은 남자는 힙합 모자 뒤편으로 길게 삐져나온 산발한 장발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오누이인 듯 보이는 젊은 여자와 함께 각각 목줄을 한 반려견 두 마리를 산책시키고 있었는데, 순둥순둥하게 생긴 불독이 주인과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었다. 그런데, 바닷가를 오가던 중 4일을 잇달아 만난 이들을, 말하자면 돈가스를 먹으러 온 식당에서 오늘 우연히 다시 보게 된 것인데, 이제 와서 보니 오누이라기보다는 부부사이가 오히려 맞을 듯했다. 서로 얼굴이 닮긴 했어도, 바닷가에서 처음 느낀 그들의 인상과는 달리, 일을 나누어 하면서도 손발이 척척 맞는 것으로 보아 두말할 나위조차 없는 부부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집사람과 막내를 집으로 먼저 보내고 나서, 바닷가 산책로로 이어지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동해안 쪽으로 종일 흐리기는 해도 비는 오지 않는다 했기에, 내킨 김에 등대가 있는 방파제까지 마저 걸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백사장으로 이어지는 데크길에는 잔뜩 흐린 바닷가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마침, 길옆에는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려던 참인지 새우깡 봉지를 막 뜯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이 사람의 발치에는 미리 온 갈매기 두 마리가 먹이를 기다리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어느 틈엔가 바다 가까운 백사장 저편에서 갈매기 네댓 마리가 양 날개를 펴고 비행기가 활주로에 안착하듯 세찬 바람에 편승(便乘)해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것을 시발점(始發點)으로, 도로변 가로등이나 상가 건물 여기저기에 한가롭게 앉아 있던 갈매기들이 여러 마리씩 떼를 지어 사내 주변으로 내려앉는 모습이 멀리서 보아도 정말 볼만했다. 도대체 어떤 신호나 소리에 공조(共助)해서 이토록 일사불란하게 먹이가 있는 쪽으로 움직이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생존본능이 따로 있을 게 분명했다.


바닷가 산책길 끝은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로 이어진다. 방파제는 포항 항구를 바다 쪽과 내항으로 각각 나누고 있는데, 오늘은 바람이 세찬 편이어서 방파제 왼쪽 영일대 해수욕장은 파도가 무척 심하지만 오른쪽 동빈 내항은 수면이 거짓말처럼 잠잠했다. 문득, 오늘의 하루 날씨가 우리 인간들의 생을 집약(集約)해 놓은 듯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까지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까지 하면서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두꺼운 구름을 뚫고 한줄기 햇살이 비치는가 싶더니만, 어느 순간 바람마저 잦아들기 시작했다. 궂은 날씨에도 새벽 일찍 출항했던 어선이 거센 파도를 가르며 동빈 내항으로 귀항을 서둘고 있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바닷가 백사장은 맨발로 모랫길을 산책하는 사람들로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롭기만 하다. 똑같은 날씨 속에서도 한쪽은 인생의 고해(苦海) 속에 던져진 듯 온통 가시밭길이고, 다른 한쪽은 유유자적 산책을 하거나 요트를 띄우고, 더러는 한가롭게 낚싯대 드리우고 시간을 낚고 있는 것이다.


오늘 새벽 인터넷으로 읽은 튀르키예 지진 기사가 갑자기 생각났다. 건물의 잔해(殘骸) 속, 가녀린 몸으로 버티고 만든 협소(狹小)한 공간 아래에서 한쪽팔로 동생의 머리를 감싼 채 17시간이나 버틴 일곱 살 소녀가 자신을 발견한 구조대에게 보낸 첫마디 말이, "꺼내주면 평생 당신의 노예가 되겠다"는 호소였다고 한다. 같은 시간, 세상의 이쪽저쪽에서 사람들은 생판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오늘 산책을 하면서 느낀 포항의 한낯 풍경은 그 반대로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코로나의 온갖 시련으로부터 막 벗어나고 있다는 안도감이 사람들 얼굴마다 감출 수 없는 느긋함으로 묻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방파제 입구에서 다시 '현주'를 만났다. 일전에 내가 글로 쓴 바 있는 글 속의 바로 그 '현주'이다. 생각과 달리, 이 두 글자는 훨씬 더 획의 크기가 크고 시멘트에 새겨진 글의 깊이도 깊어 보인다. 데트라포트에 마구 휘갈겨 쓴 이름들과는 이름의 주인공에 대한 연모(戀慕)의 정이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거무튀튀한 세월의 떼가 겹겹이 끼어있는 시멘트 표면을, 오로지 현주만을 생각하며 하얀 속살까지 깊숙이 발라냈을 사내의 억센 손길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손가락 끝이 까닭 모를 열기로 근질거렸다.


돌아서 오는 길에 영일대 해상 누각에 이르니, 멀리 영일대의 처마 아래서 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중년 여성들이 보인다. 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짐작하고는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모양새가 사진을 찍어달라는 뜻이 분명해 보였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사람과 내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이르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가로 웃음부터 먼저 번져 나왔다. 사진 좀 찍어 달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고, 난 당연히 그래야 하는 듯 스스럼없이 휴대폰을 받아 들고 그들을 앱 속프레임에다 가두었다. 해상 누각 안과 교각(橋脚) 위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스스로, 멀리 대전에서 포항 친구를 방문하 여고 동창임을 밝혔는데, 지난해 이맘 때는 나도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이곳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말로 그녀들박속같이 환한 웃음을 이끌어 냈다.


막바지, 집으로 이어지는 바닷길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자니,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섞여 물 비린내가 진동했다. 며칠사이, 저마다 긴 장대를 들고 바닷가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파도에 바닷가로 떠밀려 온 미역을 주우려고 나온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에서도 미역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다 저편에서 간간히 쇳된 숨소리가 들리면서 물속에서 솟구쳤다가 오리발을 거꾸로 해서 물구나무서듯 물속으로 자맥질하는 해녀들 모습이 보였다. 여지없이 그 옆으로는 붉은 부이가 함께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 물기를 마저 빼내고자 이들이 금방 따온 미역을 제방 위에 널어놓고, 이미 물 빠진 미역은 바로 그 자리서 저울로 달아 두릅으로 묶어 내고 있었다. 손수레를 끌고 미역을 실러 온 남정네는 담배를 피우며 바닷 쪽을 기웃거리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계면쩍은 듯 바로 시선을 피해 버린다. 바람을 타고 실려 온 물 비린내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제방 아래까지 내려가 데트라포트 틈새로 구멍 치기 낚시를 하는 노인이 있었다. 미끼를 끼우고 낚싯대를 들었다 놓았다를 몇 차례 되풀이 하다가 낚싯대를 쥔 손에 입질이 왔던지 잽싸게 위로 낚아채는데 낚싯줄 끝에는 제법 씨알 굵은 노래미 한 마리가 기운차게 바둥거리고 있었다. 노인이 미끼를 솜씨 좋게 다시 끼우고, 방금 노래미를 낚아 올린 자리에다 재차 낚시 바늘을 내렸는데 서너 번의 손질 만에 바로 또 입질이 왔다. 연이어 네댓 마리를 건져 올리는 솜씨를 보면서 넋이 빠져있는데, 입술 아래로 그만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참을 걸어서 더워진 몸이 금세 식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집이 가까워졌을 때 까지도 하늘엔 여전히 구름이 두터웠으나 구름의 색조(色調)는 흰색으로 연하게 묽어져 있었다. 처음 바닷길을 걸을 때의 무거웠던 마음이 덩달아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사실, 찬바람 속에서 간간이 터져 나오곤 하던 해묵은 기침이 우려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동네 의원에 들러 기침과 가래약을 처방받지 않았던가. 그만큼 폐렴과 코로나의 후유증은 내게 아직은 여전히 유효하고 신경을 써서 관리해야만 할 요주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마음도, 요즘의 나의 삶도 오늘 날씨와 무척 닮은 것 같다. 궂은 날씨 뒤에 쾌청한 날이 뒤따르 듯, 아니, 궂은날 속에서도 날씨의 굴곡이 이어지듯 건강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가시고 나자 요즘 내 삶은 무척 안정적이다. 하지만, 두려움 섞인 일곱 살 소녀의 깊숙한 눈동자 뒤로, 구조가 되고 난 후 안도감 속에서도 자욱이 묻어나는 슬픈 표정은 알 수 없는 미래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 가슴을 여전히 아리게 한다. 비록 꽃망울을 막 떠트리고 있는 봄꽃과 함께 희망이 움트고 있는 이 순간 마저도.


영일대 해수욕장에서는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다.
영일대 해수욕장 주변 가로등에 한가롭게 앉아있는 갈매기들
방파제 바깥 바다는 물결이 심하게 일고 있다.
방파제 내항의 잔잔한 물속을 들여다 보고 있는 문어잡이 노인
동빈 내항으로 서둘러 귀항 중인 어선
'현주'를 연모하는 마음으로!
바닷가 모래 위를 맨발로 걷는 여인
오후들어 잠잠해진 바다에서 요트를 즐기는 사람들
제방에 널어서 물기를 빼고 있는 미역
미역을 두릅으로 묶고 있는 여인과 손수레를 끌고 온 노인
미역을 따기 위해 자맥질하는 해녀
구멍 치기 낚시로 노래미를 낚아올리는 낚시꾼
눈을 틔우고 있는 목련
꽃잎이 열리기 직전의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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