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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Feb 28. 2023

가시와 움

오늘, 아무런 생각 없이 문밖을 나섰다가 환호해맞이 공원의 끝자락, 모퉁이 진 비탈위로 나 있는 계단을 보고 가던 발걸음을 돌렸다. 공원의 능선을 따라 걷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생긴 탓이었다. 사실, 아프고 난 후 몸의 회복이 더뎌 산을 오른다는 것이 아직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근 한 달 이상을 양발 끝 모아서 서기나 고무 밴드를 이용한 다리 벌리기를 통해 환(患) 중에 손실된 종아리와 허벅지 근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기에 약간의 경사길을 오르거나 어지간히 먼 길을 걸어도 몸에  무리가 없었다.


공원 초입(初入)의 비탈길은 평소에도 단박에 오르기엔 벅찰 만큼 가파른 곳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걱정했던 양쪽 다리의 힘이 전혀 달리질 않았다. 다만, 콘크리트 계단이 끝나고 능선의 정상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에 이르자 호흡이 약간 거칠어졌는데, 잠시 속도를 늦추면서 숨을 고르고 나니 이내 숨결 안정되었다. 정말 모든 게 신기했다. 그저 집안에서, 매일같이 삼십여 분간 스트레칭과 양발 끝 모아 서기와 고무 밴드를 이용한 다리 훈련을 반복했을 뿐인데 몸상태는 이전보다 오히려 더 아진 느낌이었다.


해마다 3월이면 개학과 함께 새로이 걷기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추워진 날씨와 함께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어 집 밖을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온 겨우내 집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지내다가 날이 풀리고 개학이 가까워지면 우선 바닷길 걷기부터 시작해서 운신(運身)의 폭을 넓혔는데, 이는 퇴직을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지난해 늦가을에 생각지도 못했던 급성 폐렴과 코로나가 엄습(掩襲)을 하자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이지 그 당시엔 새봄을 다시 맞을 수 있을까라는 삿된 절망감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


며칠 전 공원을 산책하다가 울타리를 타고 오르는 넝쿨장미의 줄기에 돋은 가시와 가지 끝으로 난 움에 잠시 눈길이 머물렀다. 줄기만 남은 넝쿨에 돋보일 수밖에 없는 가시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가지 끝 새순의 움에 웬일인지 마음이 끌렸다. 수년 전 이른 봄, 개학을 하고 나서 운동장을 산책 삼아 돌다가 학교 울타리 밖으로 우연히 보았던 장면과 겹쳐졌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운동장으로 내려갔다가 학교 울타리 철망을 타고 오르는 넝쿨장미의 가시와 움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문득, 그때 써 둔 글이 있다는 데 생각이 쳤다.


             《 가시와 움 》

요즘 새로 걷기를 시작했다.
겨우내 동면하는 짐승들처럼
움직임이 없었던 탓일까
그새 체중이 확 불어 버렸다

속을 비워가며 겨울을 버티는
짐승과는 달리
나는 오히려 속을 채워가며
한 겨울을 보냈다

술자리에서, 남 이야기하듯
중년의 건강을 넋두리 삼는다
협심증과 심근경색, 얼마 전까진
이름마저 생소했던 병들이
이제 내겐 너무나 익숙하다
그 사이, 알고 지내던 우인들이
속절없이 세상을 등져버렸다

마음속에 불쑥 가시가 자랐다
날카로워지고 예리해졌다
날이 잔뜩 선 말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입 밖으로 벗어난 것을
가시 돋은 반응으로 알 만큼
내게는 무뎠지만
그대에겐 가혹한 상처로 남았다

오늘, 가슴속에 돋아난 가시를,
웃자란 생채기 살 도려내듯
스스로 저며내며 아파한다

돌아서 보니 길모퉁이,
아직은 앙상한 나무줄기엔
붉은 상처 같은 예리함이
날카롭게 돋아나 있다
이건 분명 가시다
세상을 야멸차게
내지르는 그 뾰족함이
신랄한 아픔으로 내게로 와
한 점 한 점 가시로 박힌다

마치 마지막 눈물 한 방울처럼
아파하며 진저리 치는 가지 끝,
점점이 가시 박힌 그 자리엔
새 움이 눈물 한 방울로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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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운동장을 걷다가 울타리를 앙칼지게 타고 오른 넝쿨장미를 우연히 보았는데, 줄기에 돋은 가시가 가슴으로 박혀 들어 진정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를 느낄 수 있었으므로, 그래서인지 오히려 마음이 아파서 희망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오늘 저녁, 퇴근길에 고등학교 동창생 녀석의 전화가 왔습니다. 문득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노래가사가 있었습니다.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너 때문이야'

익히 알고 있는 노래 가사 그대로입니다. 한나절 가슴으로 아프게 했던 가시와 상처를, 불쑥 걸러 온 친구의 전화 한 통화로 위로받은 지금, 그래서인지 오히려 마음은 더 행복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암만 생각해 보아도 나는 가시이면서, 스스로 움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공원 능선의 맨꼭대기에 있는 정자(亭子)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은빛 물결 건너편으로 포스코 전경(全景)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데, 지난해 여름 한바탕 호되게 물난리를 겪고 나서 복구까지 거의 마무리되었다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정자 아래로 내려가 다시 목책(木柵) 계단을 따라 비탈길을 오르면 산사태를 방지할 목적으로 사방공사(砂防工事)를 하고 난 후 산꼭대기를 평탄하게 밀어버린 널따란 평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다보면, 정말이지 언제 어느 때든 가슴이 확 트인다.


주말이면 몸살을 앓는 스페이스 워크는 평일임에도 날이 좋아서인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늘은 동남아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이 인솔자의 뒤를 줄지어 따라가며 스페이스 워크 여기저기를 배경 삼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스페이스 워크 맨 위에서는 약간의 흔들림에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포토존을 찾아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분주했는데, 이 마저도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어제는  옛 직장 OB들과 이른 점심을 먹고 한동대학교 주변의 야산을 돌고 왔다. 대부분 대화의 주제가 건강과 내려놓는 삶의 마음가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마음속에 함께 도사리고 있는 가시 같은 마음과, 새로운 삶에 대한 마음속의 용솟음, 움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흔적으로 남은 가시와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으로  돋움하고 있는 움. 지난 몇 개월 사이, 나만큼 몸속에서 가시와 움을 제대로 느끼고 가슴으로 품었던 사람은 드물 듯하다. 하지만 지난 상처의 아픔은 기억으로만 남을 뿐, 이미 내 가슴속 가시는 그 끝이 무뎌진 지 오래이다.


집으로 돌아와 마주한 아파트 뒤편의 모란과 입구 쪽 동백이 저마다 꽃망울을 함박 머금은 채, 부드럽게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아 한껏 요염하게 헤살거리고 있다.


울타리 너머에서 학교 안을 기웃거리는 꽃망울
목책 너머로 아스라히 보이는 포스코
스페이스 워크를 찾은 사람들
찍는 자와 찍히는 자
스페이스 워크의 나선형 궤도
스페이스 워크의 포토 존에 선 사람들
트레킹 중 잠시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OB들

https://youtu.be/9t8M26W8s4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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