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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l 17. 2024

아, 조해일

6월 중순 어느 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김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선생 쉰다섯의 적지 않은 나이인데, 내가 3년간 줄곧 담임을 맡아 졸업을 시킨 첫 제자이다. 비록 얼마간의 시차는 있지만 퇴직하기까지 30여 년  함께 교사의 길을 걸어온 교육동지이기도 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에 가히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선생님이다. 올해도 여지없이 고 3 담임을 맡은 모양인데, 학생지도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안부 삼아 일부러 기별(奇別)을  온 것이다.


전화기 너머다급하게 들리는 말이, 우선 우리 집 주소부터 문자로 남겨 달라고 한다. 내가 저어하지만 않는다면 소설가 조해일의 문학전집을 보내주겠다는데, 일순 염려되면서도 곤혹스러운 마음이 없진 않았다. 시각적 현상을 우선시하는 즉물적(卽物的) 인터넷 문화에 진작부터 젖어있던 나로서는, 종이로 활자화된 문자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는 지난날의 독서법과 거리가 먼  이미 까마득한 세월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고리타분하게도 문학전집이라니!


고등학교 시절, 하굣길에 동네서점에 들러 이런저런 책을 사모으던 버릇이 있었다. 처음엔 용돈으로도 별 부담 없는 삼중당 문고의 문고판을 낱권으로 샀는데, 황순원이나 김동리, 김유정이나 염상섭같이 교과서에 실려 에 익숙한 근현대 소설가의 중단편 소설 주대상이었다. 더러는, 일련의 숫자를 매겨 소설집 사이사이 발간되는 목월과 미당, 이상과 윤동주와 같이 이름 높은 시인들의 시선집(詩選集)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소설선(小說)포함될 때도 있었다. 


문고판 소설을 사모으고 읽는 재미에 빠져 동네서점을 들락거리다가, 잉크물도 제대로 빠지지 않은 채로 가판 위를 널너리 하도록 진열되어 있는 신간 소설에도 눈길이 기 시작했다. 신문 연재소설로 한창 낙양(洛陽) 지가(紙價) 올리고 있던 최인호, 박범신, 조해일, 김홍신, 한수산, 황석영을 비롯해서, 추리소설로는 당시 대적(對敵)할 사람이 없었던 김성종이 마치 걸쇠 없는 윤전기(輪轉機) 돌아가듯 번갈아가며, 아침저녁으로 신간 소설을 쏟아냈다. 이들 가운데서, 장편으로는 최인호와 김홍신, 김성종 소설을, 단편으로는 조해일 소설을 유별나게 좋아해서 신간이 발간되어 나오는 족족, 몇 권이 되었큰맘 먹고 용돈을 털었던 기억이 난다.


 돈이 모자라, 참고서 살 돈에 웃돈까지 더해 엄마를 속여 몰래 꼬불쳐 두었목돈을 한꺼번에 쏟아붓도 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까지 손에서 책을 놓을 줄 모르는 아들을 보고 속도 모르는 엄마는 책장에 꽂힌 책이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대견해하셨지만, 그럴수록 하루가 다르게  급락하고 있는 성적을 감추느라 애간장을 녹이는 것은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


조해일을 머릿속으로 곰곰이 떠올리자, 그의 단편소설 '매일 죽는 사람', 제목이 유별나서 제목만 기억에 남은 '멘드롱 따또', '이상한 도시의 명명이', 중편소설 '왕십리', 연작소설 '임꺽정', 장편소설 '겨울여자', '지붕 위의 남자'와 '갈 수 없는 나라'가 생각이 난다. 아울러,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더불어 '매일 죽는 사람'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나 부교재의 지문으로 자주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모의고사로 출제된 문제 속 지문을 읽으며 이를 또한 얼마나 신통방통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이처럼, 조해일이란 이름 석자는 내게 있어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가 다. 학창 시절, 황순원 소설몰입한 나머지 황순원이 교수로 있던 경희대학 국문과를 한 때 동경(憧憬)했었다. 조해일이 바로  경희대 국문과를 다녔고, 그가 해당 학과의 교수가 되고 난 후 얼마 지나서 김 선생스승이 되었다. 일치감치부터, 줏대 있는 행동과 우직스러운 면모의 김 선생을 예의주시해서 경희대 국문과로 진학토록 진로지도한 것이 바로 나였으니, 뭔가 윤회(輪廻)의 자력(磁力)이라 할까, 보이지 않는 끈끈한 힘이 서로를 이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다.


조해일 문학전집은 그로부터 일주일 지나고 나서 우리 집으로 배송되었다. 문학전집이라 하여 우선 머릿속에 든 생각은, 표지를 양장본(洋裝本)으로 고급스럽게 단장한 후 두꺼운 마분지로 북케이스를 단단히 갈무리해 놓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런 모습은 아닐까 미리 짐작을 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북케이스도 없이, 열한 권의 책을 한 세트로 묶어놓은 조해일 문학전집은 낱권  하나하나가 표지 디자인부터 소박하고 정갈해 보이는 것이 마치, 늘 곁에다 두고 틈날 때마다 읽어보아야 할 교과서와 같았다.


뜻하지 않게, 반갑고도 고마운 선물을 받자마자 바로 김 선생에게 감사의 카톡을 보냈다.


김 선생. 조해일 작가의 문학전집을 방금 받았다. 곳곳에다 연락해서 지금 자랑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사진까지 첨부해서 말이야. 정말 고맙다, 김 선생! ㅎㅎ

안녕하세요, 선생님. 책 받으셨네요. 제가 먼저 제안을 해서, 간행위원회에 들어가 여러 사람과 함께 작업을 해서 나온 전집입니다.
포항에도 비가 많이 내리고 있죠? 비 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뒤를 잇는 카톡 글은 지인들에게 널리 자랑하는 내용과,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강변호사가 단톡방에 남긴 답글이다.


고맙게도, 제자인 김 선생님이 간행위원으로 직접 참여한, 소설가 조해일의 문학전집을 오늘 부쳐왔네요. 학창 시절 즐겨 읽었던 작가의 소설인지라 감회가 새롭고, 한편으론 가슴이 뿌듯합니다. SNS로 온데 자랑했더니 친구가 답글을 남겼네요. ^^

중학교 때 중앙일보에 '겨울여자'가 연재되었었는데 대구에선 중앙일보가 석간이라, 하교 후 신문이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신문이요~' 하는 소리가 들리면 잽싸게 마당으로 뛰어나가 그 자리에 선 채로 신문을 펴서 '겨울 여자'를 읽었었지. 여주인공 이화는 자신을 원하는 남자한테는 다 몸을 주었는데, 어린 나이의 나로선 도저히 이화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서, 이 놈 저놈한테 몸을 맡기는 이화를 보며 정말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나네. ^^


며칠 후, 김 선생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문학전집이 과하지 않게, 쉽게 손이 갈 수 있도록 잘 편집해서 꾸몄다는 칭찬의 말과 함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자, 다시 메신저로 긴 대화가 이어졌다.


아! 선생님, 사실 제가 한 거는 없어요.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렸지요. 부끄럽네요, 선생님. 너무나 고맙습니다. 그리고, 11권 '엑스'에는 저도 등장인물로 나옵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래? 먼저 '엑스'부터 읽어봐야겠다. ㅎㅎ

선생님, 죄송합니다. '엑스'가 아니고 4 권 '임꺽정' 1인칭 소설에 나옵니다. 착각했어요. 조세희 선생님과 조해일 선생님 두 분은 경희대 국문과 61학번 동창이시며, 친하게 지내셨다고 해요. 그 당시  대중적 인기가 더 많았던 조해일 선생님께서 조세희 선생님을 출판사에 소개해 드렸다고 합니다. 나이 들어 조세희 선생님께서 먼저 편찮으셔서 조해일 선생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죠. 휴일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어제 '엑스' 몇 페이지를 읽다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 과음을 한 후 더는 못 읽고 두었다가, 방금 막 책을 펼쳐보려던 참이다. ㅎㅎ

선생님, 약주 많이 하지 마세요. 건강하셔야 오래 뵐 수 있으니까요.

그래. 지난번 크게 아프고 난 후로 요즘은 별로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토요일인데 학교 가는지 모르겠지만, 푹 쉬도록 해라.

선생님, 지금 학교입니다. 조용한 교무실에서 수행평가 채점을 하고 있습니다. 평안한 휴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조해일 문학전집을 받은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전집 속에는 서둘지 않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들이 몇몇 눈에 띈다. '매일 죽는 사람'은 이미 읽었고, '겨울여자'가 특히 그러하다. 아직은 한참 미숙한 눈으로 작품 속 세상과 주인공을 바라보았던 청년시절 나의 시선과 지금의 내 시선은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차이나 다름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대를 명멸(明滅)한 명망 높은 작가의 온전한 작품을 고스란히 품은 기쁨이, 옛날 멋모르고 책을 사모으던 학창 시절 나의 즐거움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가벽(歌癖)을 세워 따로 서재를 꾸미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서 아이들이 읽던 동화책이나 참고서를 모조리 버리고 난 후에는 변변한 책들로 서가(書架)의 반을 채우는 것조차 요원(遙遠) 일이었다.


버리기 아까운 아이들의 전공 서적과 각종 어학서적이나 사전들, 상패나 상장, 그 사이로 그나마 아직까지 보관이 잘된 시집이나 판타지 소설, 에세이들이 종류별로 서가의 칸막이마다 몇권씩 꽃혀 있고, 그 앞에 컴퓨터 데스크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현재 내 몫으로 관리되어야 할 변화된 서재의 실상이다. 그래. 아이들 손을 떠난 피아노가 구석자리에 놓여 허전함을 메꾸고 있긴 하는구나. 하기는, 소위 내돈내산으로 서가를 채울 일은 다신 없겠지!


아! 조해일. 이런저런 생각에서 비롯된 착란(錯亂)때문이었을까? 서가의 맨  윗자리에 이 모셔놓은  책의 날  잉크냄새 인해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처음 배송되었을 때 / 서가의 맨 윗자리에
조해일 문학전집 간행을 위해 수고한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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