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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l 15. 2024

거미집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몸이 반응할 때가 있다. 팔다리에 오돌오돌 소름이 돋거나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몸이 근질거리고, 어떨 때는 소스라쳐 놀란 살가죽이 아릿아릿 쓰라려오기도 한다. 보통은, 미리 예상하거나 짐작할 수 있는 느낌아니기에 무척 기분이 나쁘거나 별로일 때가 많다.


주 오랜만에 집 앞 공원을 걸었다. 이른 시간이어선지는 몰라도 새벽운동을 나온 동네사람 말고는 인적이 드물었다. 오랜만에 누리는 여름 공원의 호젓함. 등산로 초입에 이르자, 능선 타고 오르내리 바닷바람에서 설핏 솔향이 묻어났.


어떤 날은 밥상 위로 차려낸 푸성귀 냄새가 날 때도 지만, 며칠 째 이어지고 있는 무더위 탓인지 풀숲의 들은 원래의 싱그러움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장마를 벗어난 하늘은 여전히 잿빛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었고, 제풀에 꺾여버린 날씨가 가까운 곳으로 잠시 산책을 나서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을 어귀로부터 물의 공원까지 이어지는 샛길을 오랜만에 걸어보기로 했다. 좀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기에, 야트막한 구릉을 오르는 오솔길에는 잡풀이 여름 내내 우거져 있어 바닥의 흙이 사이에서 듬성듬성 비쳐 보일 뿐이었다. 


경사가 만만하긴 해도 단숨에 비탈길을 오르려니 금세 숨이 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앞만 보고 걷고 있는데, 진작부터 언저리를

간질이고 있는 촉감 성가시 불편했다. 인적 드문 오솔길을 걷다 보면 어쩔 수없이 걸리게 되거미줄 때문이었다.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을 모자로  훔쳐봐눈가로 벌레가 기어 다니는  성가신 느낌은 여전했다. 바로 그때였다. 길섶 고목나무를 가운데 두고 나뭇가지 사이를 촘촘히 이어놓은 물빛 거미집이 눈에 들어온 것은! 빗방울같이 방울진 이슬이 겹겹의 거미줄을 따라 도로록 맺혀있고, 우러러 하늘의 잿빛 구름을 배경 삼아 도도해 보이는 것이 아슬아슬한 절벽 위를 홀로 서 있는 중세의 고성 같았다.


거미집 가장자리에 도사리고 있는 거미는 다리 길이까지 합쳐서 족히 가운데 손가락 마디만 했다. 그런데 말이다. 평소 같으면, 가는 길을 막아선 거미집이 성가셔서, 아니면 흉스럽게 보이는 왕거미의 기세에 눌려 내치거나 피해 갔었을 길을, 오늘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미줄에 걸린 날잠자리처럼, 최후의 순간을 눈앞에 둔 먹잇감의 처절하고도 허둥대는 몸짓거리를 해대면서 말이다.


그래, 저놈처럼  인생도 평생 나만의 거미집을 지으면서 살아온 삶에 다름 아니었구나. 세상이란 울타리에서, 그나마 쉴 만한 한 줌의 공간과 공간 속에서 버텨 줄 버팀목을 찾아서, 얼기설기 피땀으로 엮어 집 한 채 일구려고 살아온 삶이었었구나.


평소와 다른, 생소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머릿속이 금세 어지러워졌다. '맞아! 진작부터 난, 은퇴 후의 삶이 무척 안온하고 여유로울 것이라는 교만한 마음으로 흠뻑 젖어있었던 거야.' 사실, 당시의 나는 학교로부터 하루라도 일찍 벗어나고 싶을 만큼 몸과 마음이 일치감치 번아웃되어 있었고, 퇴직 후 당장 내게 주어질 연금은 상상만으로도 몸이 녹아들 정도로 달콤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발걸음을 가로막고 있는  거미집은 어떠한가.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 언저리를 간질이는 거미줄의 촉감어찌나 걸치적거리던 단매로 당장 거미집을 요절내고 싶을 만큼 손이 근질거렸다. 아마 거미란 놈은 당장 눈앞으로 닥친 위기에 무감각거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속수무책이었겠지. 그래. 우리들 인생사도 마찬가지라어디 굴곡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저기, 삶의 기반 통째로 너뜨릴지도 모를 모진 풍파가 닥친다 우리 사람인들 어찌 쉽게 감당할  있겠는가. 나 역시, 생각지도 못했던 급성폐렴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적이 있지 않았었던가!


어찌 보면, 우리네 인생이란 번듯한 거미집을 지으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삶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아마, 요즘 젊은이들은 보다 더한 피땀을 흘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일순 마음이 겸허해졌다. 머리를 조아려 조심조심 비켜서 갈 때, 구릉을 타고 가쁜 숨 몰아쉬며 올라오는 바닷바람에 거미집이 크게 한번 요동쳤다. 고개를 들고 모둠발을 돋으니 , 멀리 물의 공원 너머로 보이는 우리 집 베란다 유리창이 막 구름을 걷어낸 아침 햇살을 한가득 품으면서 오늘따라 유난히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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