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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l 21. 2024

신체검사받던 날

아마 그날도 장맛비가 수그러들 기미가 없7월의 어느 날이었을 거야. 학기말 시험을 다 치르고 난 후라 마음이 홀가분하긴 했어도, 앓던 이에 염증이 다시 도졌을 때처럼 기분이 며칠 째 별로였어. 하긴, 방학  날을 잡아서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통보 마지막 성적표가 골칫거리이긴 했어도 말이야.


사실은, 결과가 뻔한 성적표보다는 신검 날짜를 먼저 받아두기는 했었지. 며칠사이 골머리가 그토록 지끈지끈던 건, 어쩌면 신체검사를 코앞에 둔 조바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아니 , 그보다는 기말시험 중, 병원에서 미리 확인해 본 병사용 진단서의 결과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해.


구미가 고향인 K가 중간고사를 마치고 축제기간 중에 신검을 받고 와서는 넌지시 내게 말을 건넸다.


"야, 니도 나처럼 눈이 많이 나쁘니까 보충역 판정을 받을 수 있다. 미리, 병원에 가서 병사용 진단서를 떼어 제출하면 바로 방위가 될 수 있다 카이 끼네. "


이게 뭔 말인가 싶었다. 나보다 두꺼운 안경알을 끼고 있어 눈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도 눈이 나쁘다 해서 현역 징집을 빠져나갈 수가 있다니! K가 구구한 설명과 함께 나름의 비책(秘策)을 일러주었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쓸만한' 병사용 진단서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침, 건너 건너 친구의 아버지가 대구 D 종합병원 안과 과장님이었다. 정중한 인사와 함께 아들과의 친분을 잘 포장해서 내원(來院)한 이유를 밝힌다면, 모르긴 해도 굳이 불리한 소견을 진단서에 적시(摘示) 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진료가 시작되면서부터 그런 믿음은 더욱 커졌다.


안과용 진료의자에 앉으니, 바로 세한 설명과 함께 정밀검사를 실시했다. 검사에 필요한 시약(試藥)을 양쪽 눈에 넣어 눈동자를 고정시키고는 시력 측정기를 접안(接眼)시켰다. 진료 중에는 뜻밖에도 입대를 늦춘 이유까지 물어와서, 은근히 솟아 오른 기대감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단지의 결과는 기대와는 달랐다. 진단서에 표기된 광학적 시력은 좌안이 4.5 디옵터이고 우안은 5.5 디옵터였다. 안과 과장님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 시력은 보충역 판정을 받을 만큼 그다지 나쁘지 않네. 좌안과 우안의 시력차도 크지 않고."


가급적이면 현역 입영을 피해보려 했던 속내가 공공연하게 들킨 것 같아, 결과지를 받아 들 땐 양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집에서 출퇴근하면서도 병역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지 그저 알아보려 했을 뿐인데. 기껏 종이 한 장에 이토록 실망하다니.'  어느새, 간사한 마음이 속살거리며 무너져 내린 심신을 보듬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진단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물론,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아서 이긴 하지만.


그런데, 병사용 진단서의 후유증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바로 다음날엔 두 과목의 학기말 전공 시험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 못다 한 시험준비를 하려고 책을 펼쳤는데, 도무지 글자의 초점이 잡히질 않는 것이다. 평소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는 데다, 입대 전 마지막 학기라고 스스로 다짐하던 터였으니 공부가 제대로 되어 있을 리 만무했다. 암담한 심정으로 잠이나 자려고 안경을 벗었더니, 그제야 신문지의 깨알 같은 글자가 오롯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시약의 약효로 인해 안경을 벗음으로써 반대효과가 난 것이었다. 정말이지, 불행 중 다행이란 심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요즘과는 달리, 체검사는 징집 대상자인 장정(壯丁)의 본적지에서 실시되었다. 신검 시간이 오후로 배정이 되어서, 의성 터미널에는 이른 점심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구내 중국집에서 냉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는데, 여느 냉면 전문집 못지않게 시원하면서도 겨자의 까칠한 감칠맛이 눈물이 찔끔 날 만큼 특별났다.


신검 장소로 배정된 의성 체육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신검 대상자들은 훈련소에 입영  장정처럼 다뤄졌다. 현역 군인들의 고압적(高壓的)인 지시에 따라 장정들이 이곳저곳으로 나눠졌는데, 아마 현 거주지별로 인원수를 구획(區劃) 한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실시된 검사는 기초적인 신체 측정으로, 키와 몸무게, 그리고 시력을 재는 일이었다. 시력을 측정하기에 앞서  병사용 진단서를 미리 제출받았는데, 진단서에 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따로 정밀검사를 통해 시력을 재측정함으로써 징집의 판단자료로 삼으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공교롭게도, 내 앞뒤의 장정 두 사람 모두 병사용 진단서를 제출해서 함께 나란히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일반 장정들은 시력 검안표를 사용해서 의례적인 시력 측정을 했다. 바로 앞 장정 순서가 되었을 때였다. 군의관이 앉은자리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눈을 치켜뜨며 한 마디를 한다.


"넌 진단서를 제출했으니, 따로 정밀검사를 받아야 . 저 쪽 장정들이 모인 곳에 가 서 있어! 그런데 자넨 모사드가 뭔지 알아?"


순간, 갑자기 귀가 확 트였다. '왜 생뚱맞게 이런 질문을 하지? 모사드는 저 유명한 이스라엘 첩보기관이 아닌가?' 멀뚱하니 서서 눈만 꿈벅거리고 있는 장정힐끗 쳐다보더니 얼른 뒤로 가 서 있으라고 매몰찬 눈짓을 한다. 그리고, 내 순서가 되어서 막 군의관 앞을 지나갈 때였다.


"어이! 자네도 안경을 벗어봐."


이러더니,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외눈으로 안경의 좌안과 우안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양쪽 눈 시력 차이가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자넨 모사드가 뭔지를 알아?"


난 신문을 볼 때 새책의 출간 소식이나 광고를 꼼꼼하게 챙겨보는 편이다. 마침, 며칠 전 스포츠 신문에서 모사드를 타이틀로 한 신간이 간행되었다는 소식을 읽은 적이 있었다.


"예, 이스라엘의 첩보기관으로, 최근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군의관이 얼굴을 치켜들고 나를 바라보는데, 오래된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 책 읽어 봤다고? 그렇지!  젊은 친구라면 나라 지키는 일에도 관심이 있어야지 말이야. 안 그래?"


사실, 책을 읽어본  건 아니지만 모사드가 어떤 곳이고 무슨 일을 하는 기관인지는 그럭저럭 알고 었다. 얼떨결에,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자넨 모사드 요원들 중 누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


순간,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지만 얼마 전 해외 토픽에서 읽은 기사 내용이 번개가 스쳐가 떠올랐다.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나치 최후의 전범(戰犯)끝내 찾아내서 단죄(斷罪)한 그 사람이 가장 인상이 깊었습니다."


"아, 그 사람! 그 사람은 나치 희생자로 민간인이지 모사드 요원은 아니잖아? 물론, 책에서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 계속 길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자네도 뒤쪽에서 대기해!"라고 말하곤, 다음 장정을 눈짓으로 불러냈다.


슴을 쓸어내리며 자리 뒤편으로 이동하면서도, 한편으론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확한 시력을 뻔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시력 재검사를 위해 다른 종목의 검사 순서만 뒤로 밀려서 결국은 그만큼 귀가(歸家)가 늦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시력의 정밀한 측정을 위해 암막(暗幕) 속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까지 말이다.


장정들의 일반 시력 검사를 모두 마치고 나서, 진단서 제출자를 대상으로 한 재검사가 실시되었다. 다시, 정해놓은 순서대로 군의관의 부름을 받았다. 내 순서가 되어 암막 안으로 들어가니 군의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안경원에서 사용하는 시력 측정기를 용해서 시력을 다시 검사했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 한동안 곰곰이 생각에 젖더니, "자넨 면제될 만큼, 양쪽 눈의 시력차가 크지 않구먼. 보충역!", '이 어찌 언감생심(焉敢生心)이 아닐 수 있으랴! 내가 보충역이라니'. 다시 말해, 집에서 출퇴근하며 병역을 마치보충역이란다. '음, 하. 하. 하!' 감히 기쁜 내색조차 하지 못한 채, "보충역!"을 소리 높여 복창(復唱)하고선 서둘러 암막을 빠져나왔다.


한 차례의 고비는 더 있었다. 혈압 측정 등, 순서에 따라 다른 종목의 신체검사를 모두 마치고 징집관 앞에 섰을 때였다. 어김없이, 내 앞의 장정징집관에게 몸을 조아리고 있었다. 앞선 다른 장정들에게 최종 판정을 내릴 때와는 달리, 사뭇 화가 나있는 말투로 장정을 나무라고 있었다. 그의 손엔 장병으로부터 건네받은 안경이 들려있었다.


"자넨, 진단서에 기재되어 있는 측정치만큼 눈이 나쁘질 않는 것 같아. 우선, 난시(亂視)가 심하다 해도 안경 도수가 병역이 면제될 만큼 그리 높은 것 같지도 않고. 의무 사령부에 가서 정밀 재검사를 받도록 해!"


아마, 의무 사령부의 재검은 검안용 시약을 넣어서 하는 검사를 가리키는 것일 게다. 마음속으로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바로 뒤를 이은 것이 나의 순서였다. 안경을 건네받아 좌안, 우안 안경알을 한쪽 눈으로 번갈아 가며 꼼꼼히 살피더니만, "자넨, 양쪽 눈의 시력차가 상당히 크구먼. 보충역!", 뒤를 이은 내 목소리가 강당이 떠나갈 듯 크게 울렸다. "예, ○○번 장정, 보충역!"


당시, 내가 신검 일자를 신청한 그날은 복학 일자를 맞추려고 다른 대학생들도 많이 몰렸다. 면제나 보충역을 노려, 소위 말하는 백 있는 사람이 많이 몰렸다는 소문이 당일 장정들 사이에서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신검일 당일에는 장정들 기강을 잡으려일렬로 도열해 있는 줄 곳곳에서 현역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고, 장정들에게 건네는 군의관이나 징집관의  한마디 한마디 역시 추상(秋霜) 같아서 준엄(峻嚴)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난 보충역을 받았다. 아니, 따냈단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신체검사를 앞두고 이른 점심으로 먹은 냉면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두고두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감추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


신체검사를 앞두고 병사용 진단서를 찢어발긴 그다음 날, 학기말 시험은 어영부영 치렀지만 내 마음은 진단서의 구겨진 종이처럼 이미 갈갈이 찢어져 있었다. 현역병으로 입대할 것이라고 예단(豫斷)한 나머지, 여자 친구에게 섣불리 이별을 통보해 버린 것이다.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속된 말로, 그녀를 은애(恩愛) 하는 마음이 컸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내가 제대할 무렵이면 학교를 졸업해서 이미 사회인이 되어 있을 여자 친구. 그렇다. 그녀를 무작정 붙들고 있을 만큼 염치가 내게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의 나로서 더욱.


여전히 이 땅의 청춘들에게, 병역의 의무란 한 번은 짊어져야 할 불가피한 부담이다. 영화나 만화 속 장면처럼 현실 속에서 참혹(慘酷)한 전장(戰場)의 현장을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요즘 세대들에겐 더욱 그럴 것이고.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는 이어졌다. 감당할 수 없는 폭우와 물난리로 아수라장이 된 곳도 여러 곳이다. 잠시 숨을 고르면, 그런 재해의 현장에서 꽃다운 목숨을 잃은 젊은이가 다. 무적 해병을 소리 높여 외쳤던 바로 그 젊은이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고, 온전(穩全)한 명예로움을 아직도 돌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개탄(慨歎)스럽다.


아마, 오늘도 미리 날을 받아놓고 신체검사를 기다리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현역으로 입대하는 사람과, 여러 가지 이유로 보충역으로 빠지거나 혹은 아예 면제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 나름의 사연은 있겠지만 이들 모두는 하나같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아들이며 청춘들인 것이다.


오늘, TV에는 해병대 훈련소 입소를 앞두고 있는 유명 연예인의 아들이 출연해서, 아버지와는 다른 천지난만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오늘 난, 그 함박웃음이 왠지 모르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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