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보리밥이 먹고 싶어졌다. 무작정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죽도시장에 내려이곳저곳시장골목을기웃거리던 중이었다. 난전에서 파는 꽈배기와 육전, 꼬마김밥과 호떡에 홀려 이미 시장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장의 중앙통로에서 샛길로 빠져 수제비로 유명한 먹자골목에이르렀다. 점심때가 가까워져서인지 시장 골목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서로 몸을 부딪히면서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장터에서 시장기를 해결하려면 이정도번거로움쯤이야미리각오를하고 와서인지, 사람들이짓는 표정마다 제각기여유로움이 넘쳤다.
보리밥집은 수제비 골목 맞은편에 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순영네 밥집'과 '대화식당', 그리고 '경북 보리밥'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집집마다 한쪽으로 비켜선 줄이 이미 길게 늘어져 있었다. 상차림은 엇비슷하지만 식당마다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식성이나 취향에 따라 단골집이 달라진다. 그런데,오늘은다른 두 집에 비해 '경북 보리밥'앞에는줄을 선 사람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식당 안으로 막 들어서고 있는 사람들 뒤로, 젊은 연인 한 팀과 애 둘을 데리고 온 앳된 엄마, 그리고 중년부부가 전부였다.줄이 조금씩 줄어들면서,고등어와 가자미, 대구뽈을 번갈아기름에 튀기는 일이 분주해질수록 구수한 생선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혼자 온 사람은, 먼저 온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 1인상 자리가 비어야만식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뒤로 길게 줄을 서 있던 사람들 서너 팀이 먼저 가게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난 뒤에내순서가 돌아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가자미 대신 고등어구이를 서비스로주었다. 나보다 앞서 들어온 중년부부는 상이 차려지기 전, 입가심으로미리나오는 누룽지 숭늉을 홀짝이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는 비빔밥에 넣을 고추장과 참기름통이단출하게 한자리에모여있었고, 마른 멸치를 가득담아 놓은 반찬통도귀퉁이에놓여 있었다.
뜻밖에도, 숭늉과 함께 고등어구이가 옆테이블보다 먼저 나왔다.보리밥과 반찬이상차림으로 마저 나오길 기다렸다가 함께 사진을 찍을 요량으로 시장기를 꾹꾹누르고 있는데, 중년부부는 먼저 내어온 가자미와 고등어구이를나중에 먹기 좋도록살점과 뼈를 분리하고 있었다.상차림이 모두 갖추어지고식사가시작되면서,이들 중년부부가식사 중 조곤조곤 나누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다.
남편이 정성스럽게 발라낸 가자미를 아내의 입에 넣어주며 말을 건넨다.
"당신, 회 먹고 싶다고 했잖아! 사실, 난 대게 먹으려고 죽도시장 왔는데, 보리밥먹어도 괜찮겠어?"
아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 괜찮아. 난 이것 먹을 생각으로 왔는데."
그러더니, 고추장과 참기름을 보리밥에 넣고 쓱싹쓱싹 비비고는 한 숟갈 가득 떠서 남편의 입에다 넣어주었다.
마침, 건너편 테이블에서는 식사를 막 끝낸 할머니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장바구니에서 지갑을 꺼낸 안경 쓴 할머니가 주인아주머니 쪽으로 돌아앉자 맞은편 할머니가 손을 쭉 내밀더니 지갑을 낚아채었다.
"이 할마이가 와 이래 샀노! 이번엔 내가 낸다 카이. 마, 니는 다음에 사라. 여기 만 사천 원이데이"
언제 꺼냈는지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가할머니 손에 들려있었다.
아마, 오늘 이 보리밥집에 온 모든 사람들 심정은 매 한 가지였을 것이다. 갑자기 보리밥이 생각났던 것이다. 쌀밥과 보리밥 반반을 섞은 비빔밥과 함께 상차림으로 나온 반찬을 남김없이 싹다 비우고 나서 자리에 일어설 때, 거의 동시에 숟가락을놓은중년부부와 그만 눈이 마주쳤다. 그들 앞, 빈 접시만남은 상차림을 보고는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들부부와마찬가지로 나도 빈 찬그릇을층층이 포개놓고는 사진을 찍었는데,밥을 먹기 전 사진보다 여기서는 오히려 이런 사진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도시장을 벗어나 집으로 갈 때는 시내 중앙상가를 거쳐바닷길을걷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나선 길이었지만 오랜만의 외출이고, 때맞춰 서늘해진 날씨는 운동삼아 걸어가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온 여름내 달궈졌던 보도블록의 열기가 많이 수그러지기는 했어도 한 번씩 솟구쳐 오르는 바람 언저리엔 나지막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중앙상가가 막다른 육거리 교차로에 이르렀을 때였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자전거가 갑자기기우뚱거리더니도로 편으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신호가 진행 방향으로 적색이어서 바로 앞 차량들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자전거의 좁은 프레임 사이에 발이 끼인 듯, 초췌한 행색(行色)의노인은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버티면서 발을 빼내려고애를 썼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몸을 일으키려하지만 이내 기력을 다한 듯 다시 어깨부터 도로바닥으로 몸을 찧고 만다. 바로 횡단보도를 넘어가서 도우려 해도 건너편 도로에서 직진신호를 받고 교차로로 진입하는차량들이 많아져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때, 신호대기 중이던 흰색 SUV에서 젊은 남자 한 사람이 뛰쳐나오더니자전거를 모로 세워 노인의 다리를 빼내고는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노인은 도로의 턱에 걸터앉아 두손으로 연신 자신의 허벅지와종아리를 주물렀다.
다시 신호가 바뀌어내가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까지 자전거는 도로 위에방치(放置)되었고, 노인도 당장은자전거를 수습(收拾)할 뜻이 없어보였다. 길을 가던 할머니 한 사람이 안타까운 눈으로 노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에게 다가가서 불편한 곳이없는지 살피면서, 따로 연락할 데가있는지 물어보았다. 힘없는 목소리로 되돌아온 말에 따르면, 노인은 혼자 사는 독거(獨居)노인이었다. 우선은, 도로에 퍼질러 앉은 노인을 일으켜 세워 도로 밖으로 벗어나게 해야 하는데 계속 고집을 부렸다. 도로의 턱을 디디고 설 수 있어야 자전거에 몸을 실을 수있다며 그냥 가던 길이나가라며손을뿌리쳤다. 교차로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커브길에 자전거가 쓰러져 있어서 도로 밖으로 옮기려고 자전거를 들어보니 엄청 무거웠다. 아마, 도로의 높은 턱에 한쪽 발을 디디고 자전거를 탄 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다 그만 중심을 잃고 고꾸라진모양이었다.자전거에 눌린 채로 프레임에 끼인 다리를 빼내기가 노인의 허약한 몸으로는 쉽지 않았을것이란 사실에 금세 수긍이 갔다.
노인을 도로변의 벤치에 앉히고는 자전거를 딛고탈 수 있도록 벤치 옆으로 옮겨 놓았다. 서로 가는 방향은 다르지만 잠시 기다렸다 자전거를 탈 수 있는지 보고 가려고 하니 한사코 먼저 가라며손짓을 했다. 좀 더 앉아서 쉬었다간다기에 미적미적 돌아서긴 했지만 마음이 마냥 개운하지를 않았다. '그냥 혼자 살아요'라며 힘없이읊조리던 노인의 목소리가 하릴없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때만 하더라도,당장 비가 쏟아질 듯내려앉은하늘엔 먹장구름이잔뜩 몰려 있었다. 점심까지 먹고 난 늦은 오후, 바닷가 산책로에 이르자 바닷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잠시거세지나 싶더니 두리뭉실 뭉쳐 있던 구름이 제풀에스르르풀리며높푸른 하늘틈새로 맑은 가을 햇살이 스며 나왔다. 머릿속이 덩달아 개운해졌다. 기실, 바닷길에 이르기까지 노인을 끝까지 보살피지 못한데 대한 자책감에 나도 모르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오랜만에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새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해맑은 구름사이로 햇무리가 돋는가 싶더니 미처 그리다 만 무지개가 살포시 모습을 드러냈다. 반쪽짜리 무지개를 보고 있자니, 마치 오늘 내가 겪은 여러 가지일에대한 심사(心思)가그대로 응축되어 있는듯했다.
갑자기 먹고 싶었던 보리밥과 우연히 목격한 노인의 낙상(落傷), 그리고 가을 하늘에 비친 반쪽짜리 무지개. 가을은 깊어가고, 입맛도 변하면서 나날이 생각이 깊어지는 요즘, 삶의 나이테 하나가 더, 마음깊숙한 곳으로 오롯이 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