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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Oct 16. 2024

늦가을 단풍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

은퇴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생직장에서 자신이 던 일을 퇴직한 후에 승계(承繼)하는 경우도 있고, 전혀 생소한 분야에서 단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에 뛰어든 사람다. 물론, 이전보다는 보수나 수당이 현저하게 줄어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소일거리로 일을 한다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용돈벌이나 생계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궁여지책(窮餘之策) 삼아 일을 하기도 한다. 노후설계가 되어 있지 않은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날품을 팔더라도 일이 있으면 감지덕지(感之德之)해야 할 세상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월요일 이른 아침, 출근길에 맞춰 산책을 다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눈길이 잠시 머무 곳이 있다. 공실(空室)이 대부분인 한 건물 귀퉁이에 있는 인력사무소 출입문이다. 일거리가 없을 때가 대부분이어서 문이 활짝 열린 사무실 안이 늘 텅 비어 있다. 일감이 많은 공사 현장엔 전문 인력 공급망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조달되고 있어서, 간혹 가다 눈에 띄는 사람들이란 대개 50대 전후의 남성들과 그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초로의 여성들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보통, 노란 조끼를 입고 이른 아침부터 길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포항시에서 일자리를 주선한 노인들이다. 이른바 노인 일자리 창출 지원센터를 통해서 고용된 사람들인데, 이들은 도로 위에 떨어진 휴지를 줍거나 골목길의 담배꽁초를 수거하고 해변 정화활동에 차출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버리고 간 오물을 분리수거하거나, 보도 위로 쓸려 온 모래를 청소해서 쾌적한 바다 환경을 조성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했다. 월요일이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간 도시의 빈자리에는 노란 조끼를 입은 일하는 노인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었다. 와 비슷하거나 훨씬 더 나이가 많을 듯한 노인들이 엄혹(嚴酷) 노동현장에 내몰려 있는 것이다.


바닷길을 따라 한참을 더 걷다가 해수욕장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가을이 오긴 오는가 싶더니만 거리의 은행잎은 어느새 물색(物色) 바뀌었다.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마찬가지여서, 그토록 극성이던 지난여름 무더위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계절은 성큼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느닷없이 가슴이 허해지고 머릿속은 하얬다. 월요일 아침, 모든 사람들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닷가에서 갑자기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조금 전 환호공원 고갯마루를 넘어 바닷길로 들어설 때, 한쪽으로 비켜선 좁다란 골목길을 잰걸음으로 스쳐 지나가던 중년 여인들의 말이 생각났다. 얇은 바람막이 쟈켓의 양어깨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것으로 보아, 공원 반대쪽 능선을 타고 올라와 한 시간 가까이 등산로를 따라 트래킹한 후, 바닷길을 되돌아 집으로 가는 경로를 택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산에 사람이 별로 없네. 날이 선선해지니까 아침 운동도 별로인 갑다. 낮에는 좀 나올란가?"


"그보다는, 올해는 단풍이 안 예쁘겄제? 늦단풍이 들라카믄 바로 겨울 아니겄나? 단풍이 지대로 익을 시간도 없는 기라."


길을 비켜주려고 잠시 멈춰 선 덕분에 두어 마디 귀에 얻어걸리긴 했지만, 그녀들이 눈앞에서 한참 멀어질 때까지 이들이 나눈 말이 머릿속에서 쟁쟁거렸다. 지나쳐 온 길을 되짚어 보니 과연 며칠 전보다는 산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수가 현저히 줄어 있었고, 오솔길 양쪽 비탈따라 아슬아슬 버티고 선 단풍나무의 물색도 그리 고와 보이진 않았다.


문득, 몇 해 전 급성폐렴으로 영남대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호흡기 병동의 4층 중환자 아래로 내려다본 단풍나무가 생각난다. 영남대 이공대학 강의동 입구 화단에 심어놓은 단풍나무는 이미 적황색(赤黃色)으로 농익어 한껏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생의 기미(幾微) 다하고 불꽃처럼 산화(散華) 열정을 고 싶었던 것일까, 뜻하지 않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생의 마지막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삶에 대한 지독한 집착과 정념(情念) 때문이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단풍을 이처럼 병상에서 허무하게 내려놓을 순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오물을 수거하던 노인들이 피곤한 기색으로 하나 둘 빈 의자를 찾아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순, 내가 함께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닌 듯해서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한편으론, 이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떠할는지 사뭇 궁금해진 순간이기도 했다.


불볕에 그을린 검붉은 얼굴들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레둘레 앉으니 마치 잘 익은 한그루 단풍나무 같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그라들지 않은 청춘의 열정을 인생의 끝물에 이르러 곱디고운 단풍으로 꽃 피운 사람들. 소일거리 삼아 거리에 나섰든 생계를 위해 부득불 날품을 팔아야 하든, 이들의 지난(至難)한 노동을 두고 살아온 지난날까지 폄하(貶下)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올해 단풍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물 건너갔을지 모른다. 10월 중순까지 꺾일 줄 몰랐던 무더위 탓일 수도 있고, 근래 가을이 짧아진 계절의 변화가 원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인생이 제대로 익어갈 시간은 남아있고 반드시 찾아오기까지 한다. 그래서, 제대로 익어가는 인생이라면 옆에서 지켜만 보아도 마치 늦가을 단풍처럼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문득, 나도 모르게 되돌아본 노인들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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