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단골로 다니는 미용실이 있다. 그 나이에 무슨 미용실이냐며 실눈을 뜨고 바라볼는지 모르지만, 내가 이 미용실을 단골로 삼은 이유는 오로지 이발비가 싸기 때문이다. 이미용실에서는 남성의 헤어 컷 비용으로, 손수 세발(洗髮)을 할 경우에는5,000원이고 머리까지 감겨줄 경우에는 6,000원이다. 아파트 근처의 미용실은 대부분 예약제이고, 남성 전용 헤어숍이나 이발소의 이발비가 10,000원을 넘어선 지는 이미 오래전 일이다.
체구가 작은 내 나이 또래의 주인아주머니는 머리를 손질하는 손속이 무척재발라서, 남자머리를 이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0분을 넘어가는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염색이나 파마 중이거나,먼저 온 여자 손님이 있더라도 미리 양해를 구하고선 남자머리부터 후딱 해치우곤 한다. 이 미용실을 즐겨 찾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한 셈이다. 16년째 이곳에서만 영업을 계속해 와서단골손님도 아주 많은 편인데, 아쉽지만 이번주를 마지막으로 미용실을 이전하는 모양이었다.
머리손질이 끝나고 세발을 하고 나니 슬쩍 주머니에다 명함을 하나 찔러주는데, 주말에 이전할 미용실의 약도와 전화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산책 중에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미용실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결국 이곳에서 마지막 이발까지 하게 되었는데,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를 보니 덩달아 마음이 즐거웠다. 왠지 모르게, 오늘 하루의 행사가술술 풀릴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간 비바람이 심하더니 오늘은 모처럼만에 하늘이 말갛게 맑았다. 온 여름내 적조(赤潮)에 시달렸던 바닷물도 가까운 바다부터 옥빛으로보이는 것이 물색이 아주 고왔다. 해마다 영일대에서 열리는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의 배너가 가로등마다 걸려 있었는데 잔잔한 바람에도나 보란 듯 이리저리 나풀거렸다.
행사 참여를 유인(誘引)하는 다양한 체험부스와 시설물이 해안길을 따라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었지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섯 곳의 지정된 부스를 방문해서 스탬프를 모두 찍은 후 엽서를 기념손수건과 키링으로 교환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으나, 아직은 이른 아침이고 또 평일이어선지는 몰라도여느 때보다 거리가 한산한 편이었다. 다만, 날이 다시 개이면서 주말까지 화창한가을날씨가 이어지면 스페이스워크를 찾아오는 관광객들과 함께 시민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을 거란생각이들었다.
그렇긴 해도,스페이스워크로 올라가는 오솔길은 제법 사람들로붐볐다. 하지만, 오늘은 하루종일 강풍이 예보되어 있어 공원 입구의 전광판에서는 진작부터 스페이스워크가폐쇄되어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닷가에서부터 줄곧 걸음을 함께 해 온 차도르 차림의 여성 두 사람이 스페이스워크 앞에서 아쉬움의 발길을 돌리는 것을 보고는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단체관광을 온 중국 사람들이 스페이스워크를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으며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으나, 돌아서는 발걸음을 하나같이 망설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매 한 가지였다. 평소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까마귀가무리 지어 날아오더니 미술관 옆 그늘진 대숲 속으로 바람처럼스며들자, 다시 공원은 인적 끊긴 적막강산(寂寞江山)이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아내와 막 외출하려던 참에 고등학교 동기로부터 전화가 왔다.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에서 정년을 한 이(李) 실장은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나,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재, 유서 깊은 유적지에 관해서는 전문가에 버금갈 만한 식견(識見)을 갖추고 있어서 평소 흠모(欽慕)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아내의 재가(裁可)를 받고는 당장 발걸음을 되돌려서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 실장과 함께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의 행적(行跡)이 닿아 있는 '부운지(浮雲池)'였다. '하늘 담은 못에 피어난 천 년 연꽃'으로 못의 절반이상이 뒤덮인 부운지. 십수 년 전 못 바닥을 긁어내다가 못 아래 가라앉아 있던 천 년 전의 연 씨를 발견했는데, 그 연 씨가 발아(發芽)하여 다시 잎을 틔우고 천 년의 세월을 건너 피어난 연꽃으로 뒤덮여 있는 못이 바로 부운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부운지를 발아래로 두고 있는 봉우리에 '나왕대(羅王臺)'가 있다. 나왕대는, 달리 '부운대(浮雲臺)'라고도 불리는데, 선덕여왕이 봄나들이를 왔다가 대(臺) 위에 앉아 풍광(風光)이 아름다운 마을을 굽어보았다는 전설이 서려있는,돌을 깎아서 만든 좌대(座臺)이다.
부운지를 좌측으로 돌아 나왕대가 있는 봉우리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온여름내 자란 잡풀로 무성했다. 길섶의 인가(人家)에서 풀어놓은 강아지 두 마리가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반짝이며 뒤를 쫓는 것이, 이놈들도 오랜만에 보는 낯선 사람이 무척 반가운 듯 보였다.마을을 굽어보는 봉우리에도 연꽃무늬 받침대인 나왕대가 놓여 있었는데, 물론 후대에 이르러서 설화를 바탕으로 다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강아지의 배웅을 받으며 나왕대에서 내려와 부운지의 나머지 절반을 돌다 보면 나왕대 원석(原石)의 잔해(殘骸)를 올려놓은 또 다른 나왕대와 마주치는데,실물이 지녔던 지난날의 형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다음으로 들린 행선지는 경주 '부산성(副山城)'과 '주사암(朱沙庵)'이었다. 그런데, 부산성을 한눈에 담기 위해서는 마을 아래로부터 오봉산(五峰山) 정상에 있는 주사암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오솔길의 폭이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고 한쪽은 낭떠러지어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내내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부산성은, 지난날 달구벌(대구)에서 서라벌(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백제군으로부터 도성(都城)을 방어하기 위해 돌로 쌓은 산성이라고 한다. 부산성은 또한, 신라의 화랑도인 '죽지랑(竹旨郞)'이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것을 추모하기 위해 '득오(得烏)'란 사람이 지은 향가(鄕歌)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주무대로 알려져 있다. 이 산성을 울타리로 하여, 오봉산의 정상에는 경상북도 문화제 제522호인 주사암이 자리 잡고 있는데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심어진 복밭으로서, 부산성을 축조(築造)하던 시기에 의상대사의 원력(願力)으로 지어진 사찰(주암사)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임진왜란 때 사명당 유정대사의 도움으로 중창불사(重創佛事)를 이룬 이후 주사암으로 개칭(改稱)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과연 오봉산 정상에 있는 주사암에 오르니, 남쪽 방향으로 겹겹으로 둘러 쌓인 산의 능선을 따라 부산성이 이어져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주사암은, 영산전과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殿閣)과 법당 뒤 사물(事物)의 형상을 닮은 바위도 볼만했지만, 김유신장군이 바위 위에 쌓아 둔 보리로 술을 빚어 병사들에게 먹였다는 마당바위(지맥석)에서 산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특히 절경(絶景)이었다. 주사굴을 돌아서 오봉산 정상에 오르니, 오봉산의 표지석(標識石)의 측면에는 '산에 남기는 것은 발자욱, 가져가는 것은 추억뿐!'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먼 훗날 오늘을 추억할 때 지금의 심정을 미리 일러놓은 것 같아 특히 인상 깊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직 해가 남아 있어서 모량에 있는 박목월의 생가(生家)까지 마저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멀찌감치 보이는 2차 선로의 맞은편에 노인 한 사람이, 온몸이 비틀린 채로 대로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차를 서행하면서 가까이 다가갈수록 노인의 몸상태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 취기(醉氣)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한 탓일 수도 있지만, 웅크린 자세로 쓰러져 있는 것이 일시적인 심정지가 온 것이 아닌가 의심되었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들이 반대편 차선을 넘어 아슬아슬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곧 사고라도 날 것처럼 보였다. 도로변에 급히 차를 세우고는 노인이 누워 있는 곳 가까이 달려가보니 사방으로 풍기는 주취(酒臭)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워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 의자에다 몸을 눕혔는데 계속 횡설수설했다. 결국 본가가 있다는 경주행 마을버스에 노인을 태우고 나서, 운전기사에게현재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야 온전히 일을 수습할 수 있었다.
목월의 생가를 찾은 사람이 마침 우리뿐이어서, 오히려 호젓해서 좋았다. 온 여름내 찾아온 사람이 드물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보도블록 틈새로는 잡풀이 푸릇푸릇 길수름하게 돋아나 있었다. 생전의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목월의 생애에 대한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이 실장의 인문학적 소양과 식견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목월과 황순원이 서로를 흠모하여 동년배의 아들이 각기 성을 달리 한 동규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과, 후일, 공교롭게도 각각 서울대에서 한 사람은 국문학과 교수와 평론가로, 또 다른 한 사람은 영문학과 교수와 시인으로 평생을 봉직(奉職)한것은 이미 널리 회자(膾炙)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조지훈의 '완화삼(琓花衫)'에 화답(和答)하여 지은 목월의 시 '나그네'와 함께 박목월 생가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그의 시 '선도산하(仙桃山下)'와 '청노루', '윤사월', '산이 날 에워싸고'와 국민동시 '얼룩송아지'를 읊조리면서 가을의 서정(抒情)에 잠시 마음을 맡겼다. 아울러 그의 첫사랑에 얽힌 비화(秘話)와, '기러기 울어 예는'으로 시작되는 '이별의 노래', '저 푸른 물결 외치며'의 첫 소절을 들으면 금세 따라서 흥얼거리게 되는 '떠나가는 배'의 늘어진 가락과 함께 다정(多情)이 병이었던 시인의 엇나간 삶도떠올랐다.목월의생가를 막 나서려는 참에 토담가에 심어놓은 감나무에서 떨어진 대봉감이 보였다. 하나는 이미 짓물러져 홍시가 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방금 떨어진 듯 껍질이 살짝 벗겨져 생채기만 아래쪽 귀퉁이에 나 있었다. 마치, 그의 애정사(愛情事)가 생가터에 떨어진 두 개의 낙과(落果)에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듯해서 한편으론 마음이 씁쓸하기도 했다.
포항으로 돌아와서는 여남동의 횟집 '바다이야기'에서 참가자미 물회를 먹었다. 입안 그득히 감도는 물회의 감칠맛도 맛이지만, 오천 원짜리 이발을 하고 나서 아침부터 이어진 기분 좋은 예감이 두리마리 휴지 풀리듯 오후 내내거침없이 술술풀렸었다.'유붕이 자원방래면 불역락호(有朋 自远方来 不亦乐乎)'라했으니, 비록 멀리 있진 않지만 친구가 찾아온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마음이 즐겁고 편안했다.
모처럼 만에 오늘은 몸과 마음이 바쁘면서도 하루종일 피곤한 줄 모르고 시간이 흘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오전을 소일(消日)하고, 벗과 더불어 신라의 사적지를 목월의 생가와 함께 두루 돌아보면서 오후 한 나절을 보냈다. 정말이지 잠자리에 드는 이 시간까지, 내일 할 일을 생각하며 얼른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