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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Oct 29. 2024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올 가을에 내리는 비는 생뚱맞다. 괜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절을 구획(區劃)하기 위해서, 기상도(氣象圖) 위로 어지럽게 선을 그어가며 기후를 구별하던 시절 이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날씨조차 불가측(不可測) 것이, 과히 바람 잘 날 없는 이 나라의 정치와 버금갈 만큼 난해(難解)  것이다. 불볕더위가 한창 기승(氣勝)을 부릴 때는 여름의 끝이 아득했었다. 그러더니, 찌는 듯한 열기를 잠시 물리는 소슬바람이 불고는 며칠째 비가 내리고 다. 심지어 제21호 태풍 콩레이가 한반도에 상륙하면 이는 11월 중에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최초의 태풍된다고 한다. 이러니, 아침부터 내리는 가을비에도 무덤덤한 마음이 낯설지 않은 것이다.


때마침, 환호공원 안에 자리 잡은 포항시립미술관에서는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내년 1월 5일(일)까지 열리고 있다. 자연적인 요인이 기후의 기본적인 변수(變數)임은 부인할 순 없지만, 일상생활을 통해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환경적 요인 역시 기후의 변화에 중요한 변인(變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문명의 발전과 기후변화를 연계하여, 인류에 의한 무모하고 무분별한 환경훼손이 지구의 안정된 미래를 담보(擔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어젯밤에 이어 오늘 아침도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굵었다. 이런 날은 아침 늦도록 단잠을 자면서 지난날의 힘겨웠던 노동을 보상받아야 마땅하지만, 예순을 훌쩍 넘어선 나이는 그런 달콤한 휴식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돌이켜 보니, 스무 살 밖에 나이차가 던 아버지 역시 생전에 새벽잠이 없으셨다. 본가에 들를 때면, 거실의 넓은 공간은 나와 아이들이 밤늦도록 TV를 보다가 함께  잠자리였다. 이른 새벽 TV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을 뜨면, 직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껏 볼륨을 낮춘  숨죽이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몸을 뒤척이 아이들을 깨워  안으로 들이고 나면, 그제야 륨을 높이고 잠시 민망한 웃음을 지으셨지만 그건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아버지처럼 새벽잠이 달아난 것이, 3년 전 당신이 영면(永眠)에 드신 그해 겨울 무렵부터였으니 그때 내 나이 예순둘, 변화된 체질(體質)과 함께 체면이 무뎌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오후에라도 날이 갤 듯한 날씨가 밤이 되자 다시 빗줄기가 거세졌다. 어둑한 밤하늘엔 먹구름이 여전했지만, 바다와 맞닿은 동쪽 지평선은 금방 갈아 놓은 먹물을 입힌 듯 윤곽이 선명해지면서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내일은 종일토록  간간이 구름 낀 날씨가 예보되어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습도가 낮아지는 것을 보니 바깥나들이를 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살짝 마음이 설레기도 하는데, 사실은 4층 새댁과 꼬마 아이를 오랜만에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지난여름 무더위가 한창일 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4층 새댁과 3남매를 우연히 만났다. 지난해 이곳으로 이사를 온 이후로 종종 마주쳤던 터여서 먼저 안부 인사를 건넸더니, 인사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시장바구니에서 꺼낸 아이스크림을 얼른 손에다 쥐어 주었다. 엘리베이터가 금방 4층에 이르러 고맙다는 말도 건넬 사이 없이 문이 닫히고 말았는데, 무엇보다도 무심결에 내려다본 꼬마 아이의 눈망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소중한 물건을 빼앗겼을 때의 원망 린 표정과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듯 앙증맞게 실룩대는 입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받아 든 아이스크림은 내가 보기에도 무량(無量) 없이 낯설고 체면 없어 보였다. 결국, 이들을 다시 만나 초콜릿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대갚음하기까지에는 이로부터 두어 달이 더 흘러야만 했다.


지난 한 달 가까이, 아파트 상가로 커피를 사러 갈 때면 거의 매일같이 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저번 주에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이 아빠와도 첫인사를 나누었다. 대갚음한 초콜릿과 아이스 아메리카노이긴 했지만, 마주칠 때마다 건넨 안부 인사가 혹시나 '과례(過禮)가 비례(非禮)'인 것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내심 염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 좋은 얼굴로 환히 마주 웃어오는 아이 아빠의 표정을 보니, 그동안의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주일 가까이 날씨가 고르지 못해서인지, 지난 며칠간 새댁과 꼬마 아이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은 듯 보인다. 아니면, 잠시 날이 개일 때를 틈타 바깥나들이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머니에 넣어 둔 초콜릿 사탕은 이미 눅눅해져 다른 사탕으로 사두려고 하는데, 내일의 일기예보처럼 4층 새댁과 꼬마 아이의 마음도 맑게 개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란 없다. 지금껏 우리가 누려왔던 청명(淸明)한 가을날씨가 미래의 가을날씨까지 담보하진 않는 것이다. 내일이 존재한다는 당연함이, 오늘의 시간 속에 포함된 모든 당위적(當爲的)인 요소까지 내일로 이어가진 않을 것이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미래의 불가측에 대해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일기예보를 막연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특히, 최근 몇 해 동안 되풀이되고 있는  이상기후가 이러한 불신의 기저(基底)가 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지난날의 역사가 내일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듯, 우리 인류는 지난(至難)하고 힘겨운 투쟁을 통해 척박(瘠薄)한 환경 속에서 지혜로운 삶의 경험을 축적해 왔다. 느닷없이 몸의 어느 한 곳이 쑤신다거나, 아침저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를 통해 내일의 날씨를 미리 예측한 것은 유구(悠久)한 인류의 역사로 볼 때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그만큼,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뜻이다.


이러한 예측 가능한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장본인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 현 세대임이 분명하건만, 온 지구상의 자연과 후세(後世)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후안무치(厚顔無恥)하기 짝이 없다.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에 전시된 하나하나의 그림들이 시사하듯,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미래의 위태로운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 속 우리의 삶의 행태부터  저리도록 반성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는 말은 안 해도 다 알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기에 오늘이 있다지만, 내일에 또 내일을 연(連)하여 이 지구상에서 영원한 삶을 이어갈 존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인간이 그토록 염원(念願)해 온 유토피아(이상향)는 사람의 머릿속에다 그려놓은 신기루(蜃氣樓)가 아니다. 우리의 후세들이 안온(安穩)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어제 불었던 바람이 오늘을 연하여 내일도 불어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늦은 밤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란 기상 캐스터의 오프닝 멘트가 오늘은 하나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가을날씨처럼 맑고 푸른 그녀의 눈웃음이 4층 새댁과 꼬마 아이의 화사하게 웃음 띤 얼굴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포항시립미술관

■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

■ 2014.10. 8(화) ~ 2015.1. 5(일)

■ 임동식 외 8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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