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꽃이 절정(絶頂)에 이르는 5월은 여러 의미 있는 기념일이 줄을 잇는 가정의 달이다. 오월 첫날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5일의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이 바쁘게 지나가면 15일 스승의 날과 19일 성년의 날이 그 뒤를 잇는다. 음력 사월 초파일의 석가탄신일 또한 양력으로는 5월 초에 해당될 때가 많은데, 공교롭게도 어린이날과 겹쳤다. 올해는, 5ㆍ18 민주화 기념일에 이어 음력 오월 초닷새인 단오(端午)가 5월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게 된다.
어버이날 아침, 어머니에게 문안전화를 올리고 난 후 모처럼 만에 이른 시간을 별려 집을 나섰다. 멀리 죽천 바닷가를 반환점으로 해서 환호공원 등산로까지 속속들이 오르내릴 요량에서였다. 동이 트고 나서 한참을 지났기 때문이었는지, 햇살 머금은 윤슬은 잠시 붉은 노기(怒氣)를 띠었다가는 은빛 포말(泡沫)로 기척도 없이 스러지곤 했다. 낙석(落石)의 위험이 있어 막아 둔 둘레길을 우회해서 죽천 바닷가로 가려면 산허리까지 가파르게 이어놓은 데크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늦가을까지만 하더라도 익숙했던 오솔길 풍경이 오늘은 무척 낯설어 보였다. 데크길을 올라서면 바로 보여야 할 텃밭과 농막(農幕)이 볼썽사납게 방치(放置)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짐승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둘러놓은 그물망이 여기저기 찢어지거나 해어진 채로 지지대와 함께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로 잡풀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텃밭 사이의 오솔길을 벗어나면 농막까지 차가 올라올 수 있도록 산비탈을 포클레인으로 완만하게 헤쳐 놓은 산판길이 바로 나타난다. 산아래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물길이어서 웅덩이지기는 했지만, 휘적휘적 내려가는 걸음걸이가 언제나처럼 기분 좋은 황톳길이었다.
호젓이 이어지던 내리막 외딴길이 대숲으로 우거진 죽천 바닷가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멀리, 자잘하게 몽돌이 깔린 자갈길이 끝나는 곳 언저리로 뒷바퀴가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승합차가 보였다. 차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길이 다져진 갓길로는 BMW와 G80이 주차되어 있었고, 이들 차량의 운전자로 보이는 두 사내가 모래 웅덩이에 빠진 승합차 운전자를 향해 뭔 말인지 한창 질책(叱責)하던 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각자 자신의 차를 몰고 함께 바다낚시를 하러 온 일행인 듯 보였다. 얼핏 봐서는 세 사람 모두 건장한 체구였는데, 반 소매 아래로 드러난 문양이 화려한 문신으로 미루어 저들 말마 따나 '생활' 꽤나 해 본 건달들임이 분명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나이로 보이는 이들은 내가 승합차 뒤쪽으로 온전히 다가설 때까지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었다. "뒷바퀴 패인 곳으로 자갈을 깔아 주고 뒤에서 밀면, 바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세 사람 중 제일 어려 보이는 사내가 바로 말을 이어받았다. "아입니더. 견인차 부르면 되니더. 하, 참 나! 행님은 이쪽 길가에다 그만큼 차 대라 캐도 말도 안 듣디만 대체 이기 무슨 꼴인교!"
사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리며, 큰 몽돌 몇 개를 주어와 뒷바퀴 아래로 밀어놓고는 발로 단단히 다졌다. 그리고는 힘을 들여 양손으로 차를 밀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나머지 두 사람도 시큰둥한 포정으로 다가오더니 힘을 보탰다. "행님요. 시동 걸고, 액셀 살살 밟으면서 천천히 운전해 보소!" 운전석에서 얼굴을 붉힌 채로 화를 삭이고 있던 '행님'이 마지못해 시동을 걸자마자 세 사람이 힘을 모아 뒤에서 차를 밀기 시작했다" 엔진의 굉음(轟音)과 함께 뒷바퀴가 두어 바퀴 공회전을 하고 나서 차체가 기우뚱하더니만 이내 모래톱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고맙니데이!", 머리를 연신 주억거리며 아우들이 번갈아가면서 고마움을 표시하는데도 '행님'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운전석에 앉아서 방금 붙인 담배만 애꿎게 빨아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처음부터 인사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으니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될 뿐, 별다른 유감은 없었다. 육손바위를 배경으로 두어 컷 사진을 찍은 다음 이를 반환점 삼아 되돌아오니, 세 사람 모두 낚시할 채비를 마치고는 데트라포트 주위를 기웃거리며 캐스팅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행님'이 나를 보더니 빙긋 웃으면서, "아까는 정말 고마웠니데이!" 라며 나지막이 인사를 건넨다. 살짝 때 늦은 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애초부터 섭섭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으므로, 서로 눈인사를 나눈 후에 돌아서는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지면서 덩달아 기분이 썩 나아졌다.
죽천 바닷길을 걷는 날은 환호공원을 패스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올 때가 많다. 오늘은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섰기에 전통놀이 공원의 초입(初入)에 이르렀는데도 시간이 넉넉했다. 그네가 있는 놀이터 쪽 등산로를 택해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지금까지 근 만보 이상 쉼 없이 걸어왔는데도 그다지 숨이 가쁘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서도 무릎이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해 봐도 신기할 정도였다.
산비탈의 허리춤에 이르면, 환호공원에서도 가장 웃자란 소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무성한 황톳길 등산로가 길게 이어진다. 흔히 떡돌로 불리는 이암(泥巖)의 낙석이 빈번해지자, 튼튼한 방책(防柵)으로 먼저 산자락을 두르고, 산꼭대기에서 산아래까지 가파른 경사면을 완만하게 깎아내리는 난공사(難工事)가 마무리된 것이 불과 서너 해 전 일이었다. 이제는 지난 일이 되어버렸지만, 해안절벽을 따라 돌출된 퇴적층에서 신생대에 생성된 지층과 선명한 화석들의 흔적을 언제든 쉽게 관찰할 수 있어서, 이곳은 한때 '신생대 화석의 보물창고'로도 일컬어지던 지역이었다. 더더욱 아쉬운 사실은, 이들 진귀한 지층이나 화석의 흔적과 함께 포항시민들이 즐겨 찾던 도심 속 천혜(天惠)의 숲길이 공사구간으로 포함되어 등산로로서의 명맥(命脈)이 그만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긴 해도, 세월이 흐르면서 기존의 황톳길로 이르는 오솔길이 여러 갈래로 샛길을 내어 차츰차츰 이쪽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들이고 있다.
맞은편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는 세명의 중년 여성들이 난데없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 곳이 바로 새로 낸 오솔길이었다. 사실, 평소라면 눈여겨보지도 않던 샛길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파른 절벽 쪽으로 꼬불꼬불 위태롭게 나 있는 오솔길이 부쩍 구미(口味)에 당겼다. 오르락내리락, 산허리의 외딴길을 따라 끝까지 걸으면 이전의 황톳길을 거슬러 올라오는 막다른 곳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여기가 가파른 해안절벽의 경사가 완만하도록 사방공사(砂防工事)를 한 곳의 한쪽 끝이다. 비탈진 아래쪽 오솔길에서 산허리 가까운 곳으로 올라서니 포스코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쪽으로 나무벤치가 하나 놓여있었다. 벤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고 있는데, 좀 더 위쪽의 막다른 황톳길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렸다. 내친김에 마지막 굽이를 돌아 힘겹게 중턱까지 오르니, 눈앞으로 민망한 장면이 잠시 펼쳐지고 있었다.
느닷없는 인기척에 더 놀란 쪽은 어쩔 줄 몰라 허둥대고 있는 노인들이었다. 먼저 나와 눈이 마주친 쪽은 엉거주춤하니 사내의 등판으로 막 몸을 싣고 있던 할머니였다. 업히려다 만 할머니가 서둘러 등짝을 떠밀자 그제야 고개 돌린 할아버지와 시선이 서로 엇갈렸다. 두 노인은 이내 서로의 몸에서 떨어지더니 할머니가 앉은 채로 업히려던 나무벤치로 다시 엉덩이를 디밀었다. 그 순간, 희한하게도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인이어 이어폰 속으로 할아버지가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괘않타! 뭐, 우리가 나쁜 짓 했나? 좀 있다 사람들 없으면 다시 업어 줄낄 끼네, 여기 잠시 앉아 쉬거라." 황망스러운 마음으로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긴 했지만, 뒤통수가 계속 간질간질한 것이 두 노인의 비수(匕首) 같은 시선으로 내 뒤꽁무니를 쫓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내려가는 황톳길이 끝나는 곳에서 좀 전 내가 발을 처음 들여놓았던 오솔길이 다시 보였다. 잠시의 망설임을 뒤로하고, 다시 산허리의 외딴길을 따라 산중턱까지 올라가며 줄곧 노인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첫 번째 벤치 가까이에 이르자 일부러 큰소리로 마른기침을 두어 차례 했다. 하지만, 노인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낯선 사람에게 눈길조차 한번 주지 않은 채 뭔지 모를 정담(情談)을 쉼 없이 나누고 있었다. 결국, 다시 내려온 황톳길에서 긴 망설임을 끝으로 오솔길로 이어지는 갈림길을 다시 한번 선택했는데, 이들의 마지막 행로(行路)가 사뭇 궁금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이젠 다리 힘까지 풀려버려, 산중턱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이 조금은 버거웠다. 그런데, 노인들이 앉아 있는 벤치 쪽으로 맨발 걷기를 하는 중년의 여성이 길게 이어진 황톳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이에 때맞춰,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우리 두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할아버지가 벤치 쪽으로 다시 등짝을 내밀자마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할머니가 노인의 등판에 몸을 싣고는 두 팔로 할아버지의 양어깨를 감싸 안았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쳐 올리자 서로를 옭아놓은 듯한 그 모습이 하도 정겹고 애틋해 보여서 '연리지(連理枝)'란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연리지는 한 나무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서 나뭇결이 하나로 이어진 것을 말하는데,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지금 황톳길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노부부의 모습은 처음부터 일심동체(一心同體)로 한 몸이었던 듯, 부부의 전형(典型)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괜히, 이들이 애써 쌓아 올린 평상심(平常心)을 무너뜨리고, 괜히 뒤를 쫓느라 심기(心氣)까지 불편하게 하지나 않을까 싶어서, 이번에는 이들을 피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산허리 쪽 오솔길을 택했다. 그런데, 조금 전 일을 생각하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오래전 황톳길을 처음 오르내릴 때, 산머리 정자(亭子) 쪽에서 황톳길로 이어진 외딴길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잡풀 우거진 공터에서 까투리로 보이는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갯짓하며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숲 속을 유유자적(悠悠自適) 하던 꿩이란 놈이 제풀에 놀라 자빠질 만큼, 나 역시도 그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대체 누가, 도심(都心) 속 산길을 걷다가 꿩을 만나게 되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흔히, 짝짓기를 끝낸 장끼는 알을 품고 있는 까투리와, 이후 아비도 모르고 부화(孵化)한 어린 꺼병이를 돌보지조차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 전, 내가 본 사람 사는 세상 속, 노부부가 함께 늙어가고 익어가는 그 모습은 지난날 내가 보았던 추억의 영화처럼 너무나도 아름답고도 고왔다.
다시 돌아와,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먼저, KBS의 인간극장을 통해 살아가는 모습이 방영되었다가 2014년 다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전 국민의 심금(心琴)을 울린, 76년 노부부의 마지막 여정(旅程)을 섬세하게 그려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별의 마지막 순간까지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끝이 슬프다. 하지만, 그 누가 죽음 이후의 이별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오늘 하루를 살아도 서로에게 연리지목(連理枝木)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그대'의 귓전에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며 연사(戀謝)를 서로 나눌 수 있다면, 그런 사랑은 이후 이별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것이다.
어버이날이 깊어가는 늦은 밤, 느닷없이 고등학교 동창의 부음(訃音)이 들려왔다. 한 때, 친구의 여동생이 포항에서 시의원으로 일한 적이 있어서 통화한 것 말고는, 졸업을 한 이후 달리 내세울 연(緣)이 없는 친구이긴 하지만 애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가슴이 아리도록 저며온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일은 동기 야유회가 포항 가까운 양포의 읍천리에서 1박 2일을 예정으로 민박(民泊)을 하는 날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리고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 밤을 새워서라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넋 놓고 울부짖고 싶다. 친구의 명복을 빌면서, 깊어가는 이 밤의 끝을 잡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