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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바닷가

by 박상진

지난밤, 잠자리에 들려고 하니 창문 턱을 타고 넘어오는 밤바람 속에서 가느다란 냉기(冷氣)가 설핏 묻어났다. 올여름은 6월 윤달까지 끼어서인지 예년보다 무더위가 길어지고 있다. 더욱이 한낮의 폭염(暴炎) 이어 며칠째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어서 살며시 살갗을 간질이는 실바람조차 반가웠다. 밤사이 몸 한번 뒤척이지 않고 새벽녘까지 곤한 잠을 잤다. 스르릉 스르릉, 이른 아침 청소차가 아스팔트 위의 먼지를 쓸고 가는 소리에 졸린 눈마저 활짝 뜨였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닷가 나들이부터 해야겠다!


물기 잔뜩 머금은 구름을 수평선 아래까지 뭉게뭉게 드리운 갈회색 하늘은 금방이라도 한바탕 소낙비를 뿌릴 기색이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은 바닷바람까지 시원하니, 얼굴을 두건으로 가릴 필요도 없이 바깥을 나돌기에는 그저 그만이었다. 우선은, 20여 분 가까이 바닷길을 재바르게 걸었는데도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편한 발걸음 끝에 잠시 마음이 방심(放心)을 하자, 여러 삿된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올해 치른 생일은 유별나다. 딱히 별다른 이벤트가 있어서가 아니라, 본의 아니게 생일 축하를 네 번이나 받았기 때문이다. 우선은, 페이스북에 공개된 개인정보에 따라 올라온 생일 축하가 맨 처음이었는데, 기실 이날의 축하 인사는 페이스북에 음력 출생연월을 공개해 둔 데 따른 것이다. 두 번째 생일은 음력 생일에 해당하는 날에 치른 실제 생일날이다. 이날은 미역국을 곁들여 생일상까지 받고 생일케이크로 단출한 파티까지 열었으니 아직까지도 흥감(興感)스러운 마음이다.


세 번째 생일은 정말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고 나서야 알아차린 사실인데, 윤 6월이 끼어서 생긴 혼선(混線) 때문이었다. 대구에서 KB국민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하는 제자의 생일케이크를 받고 어리둥절하고 있던 차에, 옛 동료 교사 K선생님이 보내온 별다방 커피와 치즈케이크까지 앞에 두고선 송구스러움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리고, 네 번째 생일은 주민등록상의 생일로 올해 치른 생일의 맨 마지막이었고, 이날도 지인들로부터 어김없이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았었다.


안부 인사도 드릴 겸,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전에도 진짜 생일이 진 유월인지 윤 유월인지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말을 조금이라도 귀담아 들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터였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윤 6월 모일(某日)로 생일을 공개해 놓은 포털사이트가 틀림없이 이들과 연결되어 있었을 테지. 누군가로부터 생일 축하를 받는 일이 분명 기쁜 일이긴 하지만, 이번 생일만큼은 뭔가 모를 민폐(民弊)를 끼친 것 같아 알게 모르게 마음이 썩 불편했었다.


어머니의 기억 속, 1960년 여름도 올해 못지않게 무더웠다고 한다. 아울러, 음력 진 6월 모일이 진짜 내 생일날임을 확인한 바, 앞으로는 잊어버릴 일도 없을 테지만 포털 사이트에 생일을 굳이 삭제해야 할지는 지금부터라도 한 번 고민해 보아야겠다. 진정으로 축하할 일이 드문 이 세상에서, 서로 간의 존재를 두고두고 기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인 생일 공개의 의미가 삿되이 퇴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시,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바닷길 옆 여자화장실 앞으로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몇 해 전 새로 지은 이 화장실은 냉온방 시설에 비데까지 갖춰져 있고, 외관도 예뻐서 용무가 있을 땐 제일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관광버스가 세 대나 도로변에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은 바로 턱밑에 있는 스페이스워크를 구경온 사람들인 듯했다. '울산 중앙농협 수학여행단'이란 푯말 아래로 글짓기반, 공예반, 서예반 등등 취미별 그룹명이 따로 표시된 것으로 봐서는 이들 모두는 분명 늦깎이로 배움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고, 그렇다면 수학여행단이란 푯말이 그 이름과 아주 걸맞은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그래, 나도 한 때 수학여행단의 인솔자였던 적이 있지 않던가!


영일대해수욕장 인근을 지나쳐 갈 때는 갈회색 뭉게구름으로 우중충했던 하늘이 어느덧 맑게 개어 있었지만, 그 아래 바닷가 모래사장은 인적이 드물어서 을씨년스러웠다. 아직, 무더위조차 가시지 않은 한여름 바닷가 풍경으로는 다소 생경(生硬)스러운 모습이었다. 철 지난 바닷가라더니,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파라솔 아래, 겹으로 쌓은 플라스틱 의자 위로 모래 먼지가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이 방치(放置)된 지 이미 여러 날 지난 듯했다. 희한하게도, 모래사장 위를 무리 지어 오가던 갈매기나 비둘기조차도 오늘은 그다지 눈에 띄질 않았다.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은 바닷가 기슭 쪽을 택해 양방향을 드문드문 걸어가고 있다. 온 여름 내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모래조각 작품들만 모래사장 한가운데 오도카니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올해의 영일대 샌드페스티벌은 9월 중순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고, 무더위가 한풀 꺾이면 이들 조각품들은 틀림없이 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다.


포항시민들의 염원(念願)을 형상화한 '영일대 샌드페스티벌, 모래의 합창'과 APEC 경주 개최의 성공을 기원하는 '2025 APEC 코리아 경주', 올해 초 SBS에서 방영된 '나의 완벽한 비서'와 2021년 tvN에서 방영되어 공전(空前)의 히트를 친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를 통해 공감과 치유(治癒)의 긍정적 감성을 아이콘화 한 'FEEL THE AIR OF POSITIVITY in Pohang', 그리고 포항의 먹거리를 자랑하는 '포항 십미(十味) BEST HEALING FOOD'는 작품의 완성도와 함께, 전시(展示) 기간 내내 잘 보존되어 이를 찾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잘 위무(慰撫)해 주길 바랄 뿐이다.


영일대해수욕장에서 새롭게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포항시에서 해양관광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조성한 '빛의 시계탑'이 바로 그것이다. 포항을 스마트 해양관광도시로 이미지 업을 하면서 영일대해수욕장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게 될 이 디지털 조형물은, 기존의 노후된 시계탑을 철거하고 태양과 바다, 파도와 빛을 형상화한 디자인에 LED 조명을 더해 밤에도 화려한 경관(景觀)을 자랑한다. 단순한 시계로서의 기능을 넘어 실시간 날씨와 관광 정보, 축제 안내, 미디어 영상 등을 제공하는 복합형 관광 콘텐츠로, 포항시민은 물론 앞으로 포항을 찾게 될 수많은 관광객들의 관심과 사랑을 불러 모을 게 틀림없다.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송도해수욕장 쪽을 바라보면 그 사이를 흐르는 동빈항 바다 위로 양안(兩岸)을 잇는 해오름대교의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늦어도 올 11월이면 개통될 이 다리 역시 포항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포항시민들의 교통 편의는 물론, 포항시의 해안을 남북으로 잇는 간선도로의 역할과 새로운 트래킹의 명소(名所)로서 꾸준히 주목받게 될 것이다.


두어 시간 바닷길을 걷는 내내 영일대해수욕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아침나절까지는 바닷바람 속에도 여전히 지난밤의 냉랭함이 숨어 있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35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사나흘 다시 이어진다고 하니, 이번 더위가 부디 막바지 무더위이기를 바랄 뿐이다. 산과 들의 곡식들이 계절이 지나면서 하루가 다르게 익어가는 것처럼, 바닷가를 지나칠 때 불어오는 바닷바람 속 물비린내도 며칠 전과 달리 오늘따라 더욱 비릿하기만 하다. 아마, 바닷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살찌우고 있을 이름 모를 물고기가 성어(成魚)로 자라면서, 그리고 그 보다 더 아래 바닷숲 속, 숨겨진 이름 모를 해초들의 속 모를 이야기가 속속들이 뿜어지고 스며드는 냄새일 것이다.


돌아가는 길, 철 지난 바닷가의 주인 없는 파라솔엔 여전히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오후 들어, 다시 흐려진 하늘 아래 짓눌린 바다는 잔잔한 파도를 바닷기슭으로 힘겹게 게워내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세월이란 두께로 쌓이듯이 계절의 흐름도 시간을 쫓을 것이고, 오늘도 바다는 흘러가는 세월을 쫓아 여전히 그 두께를 더하고 있다.


'철 지난 바닷가' by 송창식

https://youtu.be/AT1yJ2XxsEU?si=Vk37ydi37w8_2Z6_


임자 없는 서핑보드와 인적 끊긴 쓸쓸한 바닷가
오가는 사람 없는 영일대해수욕장 산책로
주인 잃은 버스킹 무대와 모래조각 작품
2025 샌드페스티벌 대표 조각물
2025 APEC 경주 개최기념 조각작품과 포항 십미를 상징한 조각물
영일대 샌드페스티벌 조형 글자
영일대 '빛의 시계탑'의 앞과 뒤, 해오름대교의 막바지 공사 장면
















시계탑도 세월이란 두께를 쌓으리라. 촌로 미술관 등산로 스페이스워크 미술관 전시회 음악회 설명. 셔터소리


계절이 흐름 아파트 출입구 화단 앞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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