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이다. 면도를 하다가 거울에 비친 추레한 귀밑머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나이가 들어 정수리가 듬성듬성해지고 나서부터는 가르마를 튼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서로 엉켜 떡지곤 했다. 단골로 가는 6천 원 미용실, '곽헤어'로 서둘러 차를 몰았다. '곽헤어'는 새로이 미용실을 지어 이사를 온 후로도, 기존의 단골손님에다 입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동네 사람들로 늘 문전성시(門前成市)였다.
오늘은 뜻밖에도 가게 앞에 자리가 비어, 냉큼 차를 주차하고 미용실로 들어설 때는 내딛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가게 안에는 헤어 체어에 앉아 염색 중인 손님과, 먼저 와서 순서를 기다리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바로 내 뒤를 따라 들어온 다른 남자 한 사람까지 자리에 앉자 이내 미용실은 손님들로 만석(滿席)이 되었다.
테이블 모서리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 반대편에 앉아있던 분홍 가운의 여자 손님 쪽으로 잠시 눈길이 갔다. 생각 없이 들어올 땐 몰랐는데, 고개를 숙이고 미용잡지를 읽고 있는 옆얼굴이 왠지 낯이 익었다. 세상에는 썩 닮은 사람들이 적지 않기는 해도, 이 여자 손님은 그냥 내 친구 부인 이선생님, 바로 그 자체였다. 피부 관리사가 밖으로 나와 미용실 내실로 이끌 때까지 곁눈질로 잠깐 본 그녀의 얼굴 실루엣이 머릿속 잔상(殘像)으로 남아, 혼란스러운 마음이 한동안 가시질 않았다. 포항을 한 지붕 삼아 살곤 있지만,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 서로 반대편이어서 달리 일이 없으면 이선생님이 이 먼 데까지 발걸음 할 일은 좀처럼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그저 가성비만 으뜸일 뿐인 단출한 골목 미용실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궁금증에 못 이겨 기어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친구야, 오늘 미용실에서 정말 이선생님 빼다 박은 사람을 봤데이. 닮아도 우째 그리 닮았겠노?" 서로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건넨 말이었다. "그런데, 이선생님이 지금 니 옆에 있나? 설마 이 먼 곳까지 머리 하러 왔을라꼬!"
전화기 너머에서 나지막이 웃는 친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다. 내 혼자 있다. 몰라, 아까 집에서 나올 때 두피 마사지받으러 외출한다고 카긴 카던데, 거 까지야 갔겠냐." 친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배어 있었지만, 그 말까지 듣고 나니 그제야 의혹의 안개가 걷히면서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일전에, 하루가 다르게 하얗게 새고 있는 내 눈썹을 보고는 눈썹 문신을 하라며 마사지실 매니저의 미용기술을 자랑하던 곽실장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모르긴 몰라도, 이 선생님도 이런저런 입소문을 쫓아서 굳이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했을 터였다. 어디, 예뻐지기라도 한다면 천리길이라도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전날 늦도록 전국적으로 몰아친 비바람 때문에 포항국제불빛축제 본행사가 당일 아침 느닷없이 취소가 되었다. 대구에서의 볼일까지 하루 앞당겨 마무리하고 서둘러 포항으로 돌아왔지만 모두 허튼 일이 되고 말았다. 점심때가 되니 잔뜩 찌푸려있던 하늘마저 거짓말처럼 희멀겋게 개고 있었다. 올해의 불빛축제는 오락가락하는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형산강 둔치와 송도해수욕장에서 간당간당 이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한 번은 가보려고 이왕 마음에 두었던 일이었기에,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애써 추슬러 집밖으로 나서니, 초여름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 머리 위로 따갑게 내려앉았다.
비록 본행사는 취소되었다지만, 18년 만에 재개장한 송도해수욕장은 바다시청과 다양한 편의시설이 어울려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 너머 형산강 둔치로 이어지는 산책로로 접어드니, 멀리 보이는 포항운하관 아래 불빛축제 행사장과 그 앞으로 죽 늘어서 있는 장터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행사장에 다가갈수록 눈에 보이는 주변 풍경이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불빛축제 취소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장터상인들이 한시바삐 행사장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했을 것이고, 그 결과, 천막 포장을 서둘러 걷어낸 후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쌓아놓은 쓰레기 더미로 남아있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삭여가며 운하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인이어 이어폰을 뚫고 그 안의 내밀(內密)한 고막마저 찢을 듯한 하이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포항운하의 플라워 트리광장 주변에 듬성듬성 무리 지어 서있거나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는데, 출력 높은 스피커 앞에 두고 반주기에 맞춰 노래하는 사람들의 차림새나 가창력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노래가 끝난 뒤, 주변 정리를 위해 행사 담당자가 마이크를 잡고 오늘의 공연에 대해 잠시 안내를 했다. KBS N이 8월 중 방영을 목표로 기획한 버스킹 오디션 프로그램 '보이스 온 더 스트릿(Voice On The Street)'의 첫출발을 불빛축제의 본행사에 앞선 부대행사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지만, 행사 자체가 취소됨으로 해서 관중 동원에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吐露)하면서 산책 중인 시민들이 적극 공연에 참여해 줄 것을 읍소(泣訴)했다. 마침 리허설이 끝나서, 막 도착한 사회자들이 진행 요원들 몇 발짝 뒤에 서 있었는데 분장(扮裝)을 하긴 했어도 하나같이 무척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찬찬히 뜯어보니 2AM의 이창민과 최근 트롯가수로 변신한 슈퍼주니어의 성민,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에 선수로 출연 중인 가수 김보경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처럼, KBS N이 새롭게 선보일 '보이스 온 더 스트릿'은 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을 표방(標榜)하고 있는 만큼, 참가 대상을 방송 출연 중인 현역 가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로 확대하여 다양한 재능을 갖춘 모든 이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고 한다. 포항국제불빛축제를 시작으로 영덕, 강릉, 청주, 의성, 전주, 창원 등 여러 지역의 축제를 찾아다니면서, 본 경연에 앞서 미리 온라인 예선을 통해 참가자를 거르고 있다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리허설 말미(末尾)에 들어 본 몇몇 참가자의 노랫소리가 귀에 쏙쏙 박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멀찍이 서있거나 그늘진 의자에 앉아 데면데면하던 사람들이 본 경연이 시작되자 공연하는 무대의 코앞 자리까지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뙤약볕을 마다하고 미리 자리를 잡은 덕에 내가 앉아 있던 자리는 직관 1열의 명당(明堂) 자리가 되었다. 지역의 한동대 학생이 자작곡 한 노래를 기타 연주를 곁들여 멋지게 노래한 것을 필두(筆頭)로, 목포 새댁과 코딩 전공 대학생, 50대의 중년 여성, 뮤지컬 배우인 루이스 최, 시온이란 활동명을 가진 싱어 송 라이터, 다음 주 데뷔가 예정되어 있다는 아이돌 그룹 위시의 보컬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참가자의 면모가 각양각색이면서도 가창력이 모두 쟁쟁했다.
본경연이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바로 눈앞에서 카메라 워킹이 현란하게 펼쳐졌는데, 모자를 쓰고 있을 땐 몰랐지만 땀을 식히려 잠시 모자를 벗을 때는 오랫동안 깎지 않아 추레하게 보일 머리가 마음에 거슬렸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나와 내 옆에 앉은 대여섯 살 먹은 여자애를 카메라가 쓱 훑고 지나갔는데, 아마 카메라맨의 눈에는 우리 두 사람이 다정한 조손(祖孫) 사이로 비쳤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이후로도, 경연 중 몇 차례나 바로 눈앞에서 카메라 앵글을 맞닥뜨려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모른 척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면서 박수를 치거나 양손으로 노를 젓는 일까지 크게 마음에도 없는 몸짓을 따라 하느라 여간 고역(苦役)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응원군으로 함께한 포항의 여성 참가자가 우승자로 뽑히고 난 후, 눈물과 함께 청중들에게 감동적인 소감을 밝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두 시간에 걸친 경연이 모두 끝이 났다. 미스터 트롯이나 현역가왕과 같은 유명한 경연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드러났듯이, 어쩌면 이번 경연은 누군가에게 있어선 꿈을 이루어 가는 출발점이 되거나, 이미 수차례 이어지고 있는 좌절의 현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그램의 원래 취지가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과 끼를 펼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문호(門戶)를 열어주고자 하는 것이니, 여러 지역에서 열리는 다양한 축제의 흥겨움을 쫓아 이들의 꿈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쩌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인생이란 큰 무대 위에서 저마다 가진 능력과 재능을 펼쳐가고 있는, 제 인생의 버스커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무대를 마치고 나서 긴 그림자를 뒤로 두고 지친 듯 멀어지고 있는 그들의 어깨 위로 황금빛 노을이 마치 위로하듯 포근히 감싸고 있다.
다가오는 토요일에는 제5회 김영광가요제가 영일대해수욕장 광장에서 열린다고 한다. 향토(鄕土) 출신의 원로 작곡가 김영광을 대표하는 노래 중에는 지금 당장 들어도 귀에 익숙한 노래가 너무나도 많다.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자주 들리는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이나 '정든 배'가 그런 노래들 가운데 하나인데, 그가 '정든 배'를 작곡했을 때가 포항고등학교 2학년이었으니 가히 천부적(天賦的) 재능의 작곡가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이런 기념비적인 인물을 기리는 가요제가 이곳 포항에서 열린다 하니, 그동안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기량을 갈고닦아 온 수많은 버스커들이, 지난날 전유진이 그랬듯, 이번 가요제를 통해 깜깜한 밤하늘의 혜성처럼 등장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영광은 그 이후, 196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를 동안 당대의 유명 가수들이 부른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하여 중견 작곡가로서 탄탄한 입지(立地)를 쌓았다. 남진의 '울려고 내가 왔나',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이수미의 '여고시절', 방주연의 '그대 변치 않는다면', 템페스트의 '잊게 해 주오', 박상규의 '둘이서', 들고양이의 '마음 약해서', 주현미의 '잠깐만'과 '짝사랑', 태진아의 '미안 미안해', '거울도 안 보는 여자'와 '노란 손수건', 강승모의 '무정블루스', 최진희의 '카페에서', 조용필의 '잊기로 했네'등 트로트에서 발라드를 아우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히트곡들로 장르와 세대를 넘나들며 가요를 즐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며칠 전 깎은 머리가 이제는 완전히 제 자리를 잡았다. 거울에 비친 머리가 정갈하게 가르마를 탔고, 적당히 자란 머리를 빗으로 빗어 뒤로 넘기니 듬성하던 정수리의 머리숱도 웬만큼 커버가 되었다. 면도를 하면서 귀밑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난 후 얼굴을 씻고 로션을 바르고 나니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요제의 초대 가수로, 김영광 작곡가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레전드 남진과 아기 호랑이 김태연, '사랑이 비를 맞아요'로 한창 인기몰이 중인 배금성까지 출연한다니 그날, 가요제가 진행될 동안에 혹시 모를 카메라가 관중석을 훑고 지나가도 이제 난 거리낄 게 없다. 누군가의 인생 버스킹 자리에서, 내 인생 역시 나만의 버스킹에 한창일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 내가 쓴 관련 글 '정든 배'의 브런치 주소
https://brunch.co.kr/@godam98/74
♧ 남진의 첫 히트곡이 된 '울려고 내가 왔나'(축하 공연)
♧ 김태연의 '앵콜'(축하공연)
♧ 배금성이 부르는 '사랑이 비를 맞아요'(가요무대)
https://youtu.be/NIfEzmScwt0?si=xtkq6d9pLwPJ5nJ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