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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그 고단함에 바치는 헌사(獻詞)

by 박상진

해마다, 벌초를 앞둔 9월이면 마음이 무겁다. 나이가 마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윗대 어른들이 하던 일을 대신한 지 오래지만, 벌초를 함께 온 동(同) 항렬(行列)의 사람들 나이가 벌써 일흔이 지척(咫尺)이다. 그런데, 어느 집안 할 것 없이 우리 아래 세대들이 벌초와 같은 문중(門中)의 대소사(大小事)에 무관심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이미 대세(大勢)가 되어있다.


지난해 문중 벌초가 있을 무렵에는 직계(直系) 묘소(墓所)를 함께 벌초하던 삼촌 몸에 큰 탈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여동생과 막냇동생 부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벌초를 마쳤으나 예초기(刈草機) 돌아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혹, 나중에라도 산소를 둘러본 누군가로부터 '저런! 처갓집 벌초하듯 해치웠구먼.'이라고 흰소리라도 들을까 봐 묏자리의 구석진 곳, 소소한 잡풀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히 거두었다.


9월 말로 이어지는 보름 사이, 두 일요일을 두고서 투표를 한 결과 21일로 벌초날이 정해졌다. 미리 삼촌댁으로 기별(奇別)을 넣어 이번 벌초는 부득불 혼자 하기를 자청(自請)했다. 삼촌의 건강이 염려스럽기는 하지만, 막상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숙모님 목소리를 듣고 있을 때는 약간 짜증이 났다. 삼촌, 당신께서야 몸 불편하시니 벌초에 동행하는 일이 힘들더라도, 굳이 말하자면 이번만큼은 사촌동생 스스로 아버지 몫을 대신해 벌초에 참석해야 마땅했다.


그동안 삼촌이 벌초를 늘 해 오신 까닭에, 수학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사촌동생은 일요일 과외를 빌미로 벌초에 참석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올해만큼은 빈말로라도 양해(諒解)를 구할 줄 알았지만 숙모님과 통화하는 내내 벌초와 관련한 별다른 말이 없어 못내 섭섭했다. 다른 건 몰라도, 예초기를 다루다가 혹 불의(不意)의 사고라도 다면 비상조치해 줄 사람이 가까운 곳에 없다는 사실이 살짝 불안했다. 요즘 산업재해의 책임 소재(所在)를 가릴 때는, 현장에서 위급상황을 당장 처리해 줄 동반자의 유무(有無)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중국인을 구하러 야심한 밤에 갯벌로 뛰어들다 순직(殉職)한 해경의 죽음도 오로지 혼자 출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인재(人災)로서,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참사(慘事)이지 않은가.


벌초 후 성묘(省墓)에 쓸 제수(祭需)를 마련하려고 동네마트에 들렀다. 오징어를 비롯한 건포(乾脯)와 약간의 과일, 그리고 술과 떡 등 단출한 상차림 준비를 위해서였다. 카트를 끌고 채소류 매대(賣臺) 쪽으로 돌아서 갈 때였다. 아래로 내린 엄마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카트의 손잡이를 밀고 가는 어린 소녀의 거동이 왠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우선, 아이의 시선이 매대 위 어느 에도 머무르지 않고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면서 카트의 진행방향과 동떨어지게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건너편에서 내가 밀고 오는 카트와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비껴가야 했다. 아이의 엄마가 갑자기 아이의 머리높이만큼 몸을 낮추더니 마주 쥔 아이의 손을 황토가 잔뜩 묻은 무에다 올려놓고 이리저리 만져보도록 했다. 앉은 무릎을 한 채 아이의 귀에다 대고 도란도란 귓속말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무 모양이 머릿속에 그려지도록 세세히 설명하고 있는 듯했다. 어느 순간, 무의 질감(質感)을 촉각(觸覺)으로 느끼고 있던 아이의 눈과 우연히 마주쳤다. 아이의 시선 속, 까만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눈이 부셔 현기증이 날 만큼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한참 동안 아이와 엄마는 여러 매대를 사이로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서로 귓속말을 나눌 때는 함박웃음 가득한 얼굴로, 버릇처럼 살포시 입을 가려 웃곤 했는데 정말로 혼자보기 아까울 만큼 모녀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조금 전, 계산대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모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눈여겨본 뒤에야 비로소 아이가 지독한 약시(弱視)이거나 맹아(盲兒)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5시 반을 조금 넘겨 포항을 출발할 때만 해도 고속도로 주변은 여전히 어둑어둑했다. 며칠 동안 줄곧 날이 흐렸기에 벌초하기에는 오히려 살짝 구름 낀 날씨가 편할는지 몰랐다. 영천상주 고속도로로 진입하고나서부터는 여명(黎明)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멀리서 불쑥불쑥 다가오는 도로 주변이 물안개로 자욱했다. 벌초가 한창일 시기이지만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몰라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고속도로가 한산했다. 늘 그랬듯 고향을 눈앞에 두고는 마음속까지 편안해지면서,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나날이 깊어가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여간 아니었다.


동네 어귀에 한데 모여, 따로 산을 오르기 전에 집에서 가져온 예초기를 점검했다. 대구 본가에서 1년간 쟁여놓은 예초기는 구형이라서 무겁기도 하거니와 결합부를 연결할 때 늘 애를 먹었다. 더욱이 오늘은 벌초를 하는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연료를 주입하고 시동줄의 손잡이를 힘 들여 당기는데도 '푸르르' 시동이 걸리다 마는 소리가 영 시덥잖았다. 칼날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까지, 케이블 구석구석으로 연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은 탓인가 싶어 열 번도 넘게 손잡이를 당기고 나서야 '왜앵'하고 시동이 걸리면서 예리한 칼날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이 무거운 예초기를 칼날이 돌아가는 상태로 등짐으로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증조부의 산소 두 기(基)와 벌초해야 할 그 윗대 선조의 유택(幽宅)이 있는 선산(先山)은 그 아래 저수지에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 말고는 평소 인적이 드물고 경사도 가파른 편이어서 벌초하러 갈 때마다 잡풀이 무성한 오솔길로 새로 길을 내다시피 해야 했다. 함께 갈 사람이 있을 때야 예초기를 짊어지고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되었지만 오늘은 성묘에 쓸 제수품을 넣은 배낭과 갈쿠리를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론 예초기 핸들을 잡고 눈앞의 어지러운 잔가지를 헤쳐가며 깊은 산중에 있는 묏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역시나, 손에 익지 않은 일을 할 때는 처음에 우려했던 바 대로 일이 시작되는가 보다. 산 아래서는 그럭저럭 걸리곤 하던 시동이 산소를 바로 눈앞에 두고서는 좀체 걸릴 기미(幾微)조차 보이질 않는다. 수십 번 시동줄과 씨름한 끝에 시동이 제대로 걸리면, 이번엔 예초기를 짊어지려고 애를 쓰는 도중에 시동이 훅 꺼져버리곤 했다. 시동이 그럭저럭 걸려도 칼날이 잔돌 투성이의 흙바닥과 잘못 부딪혀 튀어 오르기라도 한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칼날이 허공에서 안전하게 공회전할 수 있도록 높낮이가 넉넉한 둔덕에다 예초기의 기울기를 충분히 확보하고 난 후에, 등을 대고 눕다시피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양 어깨로 어깨끈을 둘러멜 수 있었다.


다섯 기의 산소를 벌초하고 나서, 증조부의 성묘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그야말로 기진맥진이었다. 하산할 때는 길을 잘못 들어 마른 잔가지에 얼굴이 찔리기도 하고 키 높이를 넘어가는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나올 때는 얼굴 여기저기에 닿는 거미줄이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게다가, 산주(山主)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몇 해를 이어 산자락에다 표고버섯을 키우는 종묘장(種苗場) 울타리 그물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도 아니었다. 절로 화가 솟구쳐 올랐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아버지 산소는 내가 태어난 생가(生家) 바로 뒷산에 있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중에 돌아가셔서 임시로 이웃한 산주의 허락을 구해 가묘(假墓)를 쓴 이후로 그만 세월이 오래도록 흘러버렸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몇 번이나 이장(移葬)을 하려고 했었으나 대구 근교의 공원묘지에 있는 할머니의 산소와, 선산을 버려두고 고향을 떠나는 문제를 놓고 차일피일(此日彼日) 궁리만 거듭하시다가 그만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제 삼촌의 동의까지 구해두었으니, 이모조모 여러 사정을 감안(勘案)하여 이장 방법이나 장지(葬地)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눈앞에 임박(臨迫)해 있다.


이태전 할아버지 묘소를 벌초하다가 말벌에 쏘인 적이 있어 벌초를 마칠 때까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생가터에는 얼른 보기에도 근사한 조립식 주택 두 동이 들어서 있어 주변 분위기가 다소 낯설기도 했지만, 뒷산으로 올라가는 콩밭은 올해 농사를 짓지 않아서일까, 둑길이 거의 무너지다시피 내려앉아 있었다. 혹시, 다습(多濕)한 풀숲 아래 뱀이 똬리를 틀고 있지는 않나 싶어서 발아래가 무척 신경 쓰였다. 지난해 두 여동생의 도움으로 꼼꼼히 벌초를 해 두어서인지 올해 벌초는 그만큼 수월했다. 증조부 산소를 벌초하면서 생긴 요령 덕분에 예초기를 다시 가동하는데도 별 힘이 들지 않아, 성묘까지 모두 마치고 나자 마음이 홀가분 해지면서, 마음속 깊이 쌓였던 울화(鬱火)가 봄눈 녹듯이 풀렸다.


각자 할당(割當)된 벌초를 끝내고 나서 함께 모이기로 한 마을회관에는 여태 단 한 사람도 보이질 않았다. 길가에 잠시 차를 주차해 두고, 오랜만에 온 고향 마을의 풍경을 눈과 마음속으로 담아두려고 길을 나섰다. 멀리 선산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 올라가는 논두렁 옆 도랑 둑을 따라 대추나무가 수십 그루 심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 할머니 한 분이 대추를 따느라 한창 손놀림이 분주(奔走)했다. 둑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길바닥에 떨어진 대추를 한 움큼 손에 쥐고 다가가니 수구렸던 허리를 펴고 잠시 의뭉스러운 눈길로 경계를 한다.


"할머니, 고향에 벌초하러 왔다가 나락도 잘 익고 해서, 마을 구경이나 좀 할까 돌아다니는데 할머니가 보이데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등이 굽은 할머니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가지의 대추를 한 움큼 따서 포대 자루에 담으니 그제야 내게로 향하는 시선이 무던해졌다. "저기, 산아래 새로 지은 집터에 오래전 살았던 박가 성(性) 가진 사람들을 혹시 기억하세요?"


사실, 우리 고향 마을은 박가와 권가들이 많이 모여 살던 양성(兩姓) 집성촌(集姓村)이었다. 십수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70여 호(戶) 가까웠던 가구 수가 이젠 아래위 마을 통틀어 십여 호에 지나지 않는다니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할머니의 기억 속엔 60여 년 전에 고향을 떠난 아버지 이름은 없었다. 대신, 아버지와 나이차가 별로 나지 않은 권가 성의 고종사촌형 이름을 대니 물개박수를 하며 반색을 한다. 사촌형은 몇 해 전에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할머니와 사촌형수님이 바로 이웃한 친구사이라고 했다. 더 이상 말을 나누었다간, 거의 뵌 적조차 기억나지 않는 형수님을 여태껏 찾아뵙지 못한 결례(缺禮)를 스스로 실토(實吐)하는 꼴이 될까 봐 그쯤 해서 입을 다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대추를 따는 중에도 실하게 익은 대추를 이리저리 골라내어 주머니 속에다 자꾸 찔러 주었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어보니, 면이 고르지 않은 도랑 둑을 따라 전동휠체어가 한 대가 비뚤비뚤 굴러오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도 얼굴이 참 잘 생긴 할아버지가 고개를 치켜들더니만 뭔가 못마땅한 듯 경계의 눈길을 던진다. 이럴 땐 당장 신상(身上)을 밝혀, 낯선 외지인에 대한 의구심을 그 자리에서 풀어주어야만 한다. 얼른 달려가서, 물 웅덩이 사이로 위태롭게 비켜 선 전동휠체어를 둑길 한복판 맨땅으로 옮겨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도 동년배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질 않았다. 아마도 박가도 권가도 아닌 이성(異姓)의 할아버지는 우리가 대구로 이주한 이후부터 고향마을에서 살아온 듯했다.


할아버지는 기운차게 흘러가는 도랑물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저 멀리 산아래 새로 쌓은 보(洑)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 큰 저수지를 새로 만들 적에 참말로 말들이 많았제. 원래 여기가 물이 아쉬운 곳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나온 말이었지. 하지만 한 번씩 큰 가뭄이 들어 안동댐 수문을 막으면, 이 도랑이 이어지는 강줄기가 당장 눈에 띄게 가늘어지는 기라. 이젠 강이라고 부르기도 뭣하고, 한 땐 끌어 쓸 물이 없어 농사짓기가 거북하기도 했제. 그런데, 이젠 저 저수지에 물이 항시 넘치니 이 가뭄에도 얼마나 좋아. 지금 강릉 돌아가는 꼬락서니 한번 보시게나. 이 큰 가뭄에도 여긴 어림없지!"


그러고 보니 논두렁으로 둘러 쌓인 나락들이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황금빛으로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함께 국수라도 먹고 가라는 할아버지의 권유를 마다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쉬 떨어지진 않았지만 까닭 없이 마음이 든든했다. 노지(露地)에서, 온갖 모진 풍상(風霜)을 겪으며 자연 그대로 자라 알알이 토해낸 결실(結實)이, 씨알이 그다지 굵직하진 않지만 알싸한 대추 특유의 단맛으로 입 안을 가득 채울 때는, 마음속 행복이 마주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덩달아 사방을 부유(浮遊)했다. 그전까지 하릴없이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벌초의 고단함은 어디론가 오간데없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올해 벌초가 마지막 벌초가 될는지 모른다. 산소 정리에 대해선 얼마 전에 삼촌의 동의를 이미 구해두었고 이젠 내가 내릴 결심만 남아있다. 다만, 결행(決行)할 시기를 두고 곰곰이 저울질하고 있는데, 내년 5월 전까지는 손 없는 날을 택해서 선산에 있는 증조부 산소와 함께 할아버지 묘까지 싹 다 정리하려고 한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마지막 풍습으로 남게 될지도 모를 벌초와 이런저런 장묘(葬墓) 문화가 가는 세월과 함께 저물고 있다. 물론, 어느 누군가에겐 이를 두고 당치도 않은 비례(非禮)라 할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서로 사정이 저마다 다를 것이다.


올해 벌초는 시작하기도 전에 떠올린 머릿속 부담으로 스스로 마음을 짓눌렀고, 이런저런 원망스러움에 마음이 휘둘리기도 했다. 하지만, 동네마트에서 마음을 훈훈하게 적시는 애틋한 모녀지간의 정을 우연히 목격토록 해 준 소중한 기회였고, 마을 어르신들이 보여준 넉넉한 인정은 아버지의 마음처럼 따뜻한 고향사랑을 새삼 머릿속에다 되살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도, 누구를 향한 섭섭한 마음도 다 사라지고 올 가을 들어선 마음이 더욱 느긋해진 것 같다.


먼 옛날, 어릴 적 동구밖 대추나무에서는 지금처럼 가을이 한창 익어가고, 눈을 감으면 시골집 초가지붕 위로도 추석 어름의 보름달이 황금빛으로 실하게 영글고 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이 가을도 휘영청 만월(滿月)로 다시 넉넉할 추석이다!


♧ 고향생각(현제명 작사 작곡)

https://youtu.be/VAGa5PX-e5M?si=SK2NvVlI8tP4bcfe


물안개 자욱한 고속도로
생가터에 새로이 들어선 전원주택
대추나무를 심어 놓은 농수로 앞 황금빛 들녘
벌초하던 날, 고향에서 따 온 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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