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없이 살 수 있나?
김치는 언제 어디서나 내 곁에 있었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밥상에 김치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여겼다. 김치 하나만으로도 한 끼를 뚝딱 해치울 수 있을 정도로 맛있게 담그셨기에 그랬겠지만 어린 우리 형제에게 김치만 있는 밥상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어쩌다 사온 줄줄이 소시지를 형제간의 양보 없이 서로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싸우고 김치찌개 속 고기 한 점을 집어먹겠다고 젓가락 싸움을 하기 일쑤였다. 배추김치뿐만 아니라 총각김치와 깍두기는 항상 냉장고 안 공간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찬이자 식재료였다. 그러기에 매 해 연말 김장철은 우리 집안 최대의 행사로 온 가족이 몸살을 각오하는 시기였다. 달랑 네 식구가 먹을 김치를 담그기 위해 김장 전날 아침이면 우리 집 주변 아파트 상가들의 야채가게와 시장들을 한 바퀴 돌고 와 얼마나 주문이 했는지 오후가 되면 여기저기 야채가게에서 배달 오는 배추와 무가 현관문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곤 했다. 오죽하면 아버지조차 '올해는 적당히 좀 하자'라며 엄마를 말리셨지만 '하면 다 먹으니까'라는 한마디로 모든 불만들을 잠재우곤 하셨다. 저녁 내내 아버지가 배추를 썰고 어머니가 소금에 절이고 나와 함께 절인 배추를 헹구고 하다 보면 밤 열두 시가 훌쩍 넘기고 나서야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이면 아버지와 함께 안양 중앙시장으로 나가 나머지 재료들을 사 왔다. 마늘, 생강을 비롯해 새우젓과 생굴, 생꼴뚜기까지 두 손 가득 재료를 사고 나서 시장 한 구석의 순댓국집에서 아침을 먹는 것이 우리 부자의 1년에 한 번 있는 루틴이라면 루틴이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김치를 만들고 정리가 되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아버지가 만든 수육으로 저녁을 먹으며 어머니는 이번엔 70 포기 밖에 안 했다고 아쉽다고 하시곤 했다. 내년엔 100 포기는 해야 될 텐데 하는 혼잣말에 나와 아버지는 혼비백산을 하고 어머니를 말리곤 했다. 어린 동생은 그저 온 가족이 매달리는 이 행사가 재미있어 그저 웃기만 했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크고 난 이후부터 김장에 참여하게 되면서 남자 셋이서 엄마를 뜯어말리는 웃픈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쏭이 한창 김장 전성기를 맞고 있던 엄마를 만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기도 했다. 집에서 음식은 내가 하기도 했고 요리라곤 1도 모르는 쏭과 함께 김장날 갔을 때 나는 양쪽에 충분한 경고를 했다. 엄마에게는 쏭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말라고 했고 쏭에게는 우리 부모님 막장 드라마 속 시부모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고 미리 주의를 주었다. 남자들에게는 무를 썰고 온갖 야채를 다듬는 일을 시키고 쏭에게는 마늘을 빻기를 시켰지만 한번 절구봉을 내리칠 때마다 절구 밖으로 다 날아가는 마늘을 보며 그냥 나중에 버무리기만 하라는 엄마말에 시무룩하게 밀려난 쏭이 웃음으로 기억된다. 나중에 배추를 양념에 버무리기는 곧잘 하는 모습에 '옳지! 옳지!'하고 칭찬을 받더니 갑자기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폭주를 하다가 김장이 다 끝나고 나서 체력이 모두 소진되어 드러누워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부터 온갖 근육통과 몸살에 며칠을 시달려 병간호하느라 내가 더 힘들었던 웃지 못할 추억이다. 그 이듬해부터는 호은을 임신하고 낳으면서 김장날의 노동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왜 시댁에 김치냉장고가 세 대나 있는지 몰랐다가 단 한 번의 강렬했던 기억에 쏭도 우리 가족의 광적인 김치 사랑을 알게 되어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되었다.
어느 해인가부터 점점 엄마의 김치의 맛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제주로 이주한 후부터는 김장을 하시면 택배로 보내주시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너무 짜거나 금방 물러지거나 하곤 했다. 아버지 말로는 젓갈을 잘못 썼거나 소금을 잘못 써서 그랬다고는 했지만 강력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던 엄마에게는 큰 충격이었나보다. 김장날 일하기 싫어했던 동생의 처갓집은 우리 집보다 더한 집이라 몇백 포기 단위로 김장을 담근다고 들었다. 그 집도 김장철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 남자들은 장독 묻을 땅을 파고 트럭으로 배추를 옮긴다는데 김치를 너무 많이 받아 우리 집으로 조금 보내준다 해서 받았다. 예전 전성기 때의 엄마가 했던 김치만큼이나 맛이 있기에 많으면 더 보내달라고 했던 것이 엄마 귀에 들어갔나 보다. 갑자기 걸려온 엄마 전화를 받자마자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냐'는 말에 그저 죄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없는 집안에 다른 건 못해줘도 김치라도 안 끊기게 보내주려고 하는데 엄마 김치는 맛없다 하고 사돈댁 김치를 찾는 아들에게 배신감을 느끼셨나 보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고 며칠을 사과하고 나서야 엄마의 화가 풀렸지만 섭섭함이 가시지 않으셨는지 그 후로 몇 년간은 김치를 보내지 않으셨다.
가장 최근에 보내준 김치는 2년 반 전 김치이다. 커다란 김치통 한통 분량을 보내셨는데 택배를 보내고 전화를 주셨다. 30 포기만 담갔는데 너무 짜서 못 먹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받아서 익혔는데 정말 너무 짰다. 물에 헹궈도 보고 하루동안 물에 담가놓기도 했는데 짠기가 사라지지 않아 결국 김치냉장고 제일 아래칸에 2년 반 째 봉인되어 있다. 버려도 괜찮다고 했지만 버리기엔 아깝기도 했고 묵은지로 변할 때까지 기다려보자라는 마음으로 그 봉인을 풀고 있지 않고 있다. 이제는 당장 먹을 김치만 조금씩 해서 드시고 김장철에는 열 포기 정도만 사서 김치냉장고에 두신다. 세대가 있던 김치냉장고 중 두대는 언제 나올지 기약 없는 식재료들이나 약초 같은 것들로 채워지는 것을 보고 새삼 부모님의 나이 듦을 실감하고 있다.
요즘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 작년 여름부터 조금씩 이상이 있어 의정부의 여러 병원을 떠돌았지만 병명을 알지 못한 채로 점점 악화되다가 올 1월이 되어서야 겨우 서울대병원에서 검사를 해 이제야 병명이 나왔지만 병이 너무 악화되어 입원을 하게 되셨다. 매일 죽과 싱거운 반찬들을 힘겹게 삼켜내며 버티시는 엄마의 요즘 낙은 먹방시청이란다. 치료를 다 받고 퇴원하면 드시겠다는 음식리스트를 만드시며 힘든 투병을 하고 계신다. 케이크도 드시고 싶으시고 족발도 드시고 싶지만 결국 마지막은 잘 익은 김치이다. 잘 익은 김치 한 점에 고기 한점 같이 드시고 싶으시단다. 오늘내일 연차를 내고 병원으로 와서 하루 종일 엄마와 있으면서 퇴원하면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결국 김치로 귀결되는 먹방리스트에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의사 말 잘 듣고, 약 잘 드시고 하면 금방 다 먹을 수 있다고 엄마 손을 잡고 나에게 하는 다짐처럼 말해드렸다.
2년 반이 지나가는 마지막 저 짜디 짠 김장김치를 버릴 수 있을까?
너무 깡말라 버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