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로 죽을 순 없어

고개를 들어 다른 틈을 바라볼 수 있다면

by nabiee 노은

독일에 와서 놀란 많은 것 중 하나는 창문을 열면, 많은 경우 창틀에 방충망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삶의 방식은 보통 그 환경에 적합하게 설계된 이유가 다 있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짐작해 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처음 이사와서 방충망이 없음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첫째, 흐리거나 구름이 짙은 날씨가 많기 때문에 방충망마저 창에 걸쳐 있으면 그나마 적은 일조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아닐까. 독일 및 북부 유럽에는 이런 적은 일조량 때문에 약국에서 비타민 D 보조제를 추가로 구입해 섭취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고, 비타민 D 부족으로 관절이 약하거나 피부가 약한 사람들이 유독 많아 정기적으로 피부 진단을 받는 경우도 흔하다고 알고 있다. 다른 암은 몰라도 피부암 검진은 꽤 자주 받는 편인 듯하다.


둘째, 투명한 창에 대한 미적 선호도가 있는 것 같다. 독일에는 ‘투명 지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옆집에 누가 얼마를 벌고 세금을 얼마나 내는지까지 꽤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고, 무엇보다 ‘세금’ 앞에서, 또 소득 앞에서 투명한 것을 선호하듯 안과 밖이 훤히 보이는 구조를 선호하는 듯하다. 특히 오피스의 경우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건물도 많다. 개인의 아주 사적인 공간(침실이나 욕실 등)이 아닌 이상 베란다나 거실은 밖에서도 훤히 보일 수 있을 만큼,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시원하게 뚫어놓은 인테리어나 구조가 많다.


셋째, 특성상 서로를 오픈해 두고 구경하며 간단한 안부를 묻는 친밀감도 한몫하는 듯하다.

독일에 처음 와 집을 구하고 이사 온 집에도 거실에 엄청나게 큰 통창이 있었는데, 처음에 방충망이 없어서 경악을 금치 못했던 신선한 충격이 있다. 이들의 사고방식처럼 사고에 제한이 없듯, 자연스럽게 무엇이든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오고 갈 수 있다. 어쩌다가는 정말 비행하던 새가 들어오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독일에 살면서 모기는 많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방충망 설치에 대한 추가적인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건가 싶기도 하다. 대신 여름철에는 ‘와스프(wasp, 독일어로는 Wespe)’라고 불리는 벌부터 온갖 벌의 종류들이 집안을 방문한다. 여기서는 벌도 착한 벌과 나쁜 벌로 나누는데, 우리가 아는 귀여운 꿀벌은 살려두지만 와스프라고 불리는 나쁜(?) 벌은 다들 싫어한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숨을 멈추고, 나도 멈추며 그분들이 곱게 나가 주시기를 기다릴 뿐이다.


벌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자주 방문하신다. 집에서도, 오피스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창 구조이지만 창문을 열어 두면 파리가 그렇게 많이 들어온다.

손잡이 방향에 따라 문이 다른 틈으로 열린다.

여기서 또 한 번 창문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창문이 미닫이식이거나 밀고 당길 수 있는 구조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방문 손잡이처럼 손잡이를 여닫는 방향에 따라 90도 각도로 돌려 실내 쪽으로 당기면, 나를 향해 창문이 180도 방향으로 쏟아져 열리는 구조도 있고(아랫부분은 닫혀 있고 윗부분만 열리는 식), 온갖 각도와 방향으로 창문을 신박한 방법으로 열 수 있다.


특히 겨울철에는 파리가 안이 따뜻하니까, 밖에 나가야 살 확률이 높을 텐데도 따뜻하다고 안 나가고 안에만 머문다. 문을 열어 줘도 그렇다. 그렇다고 사람에게 잡히는 건 싫은지, 천장 맨 꼭대기에만 붙어 지낸다.


파리가 한 번 들어오면 나갈 때까지 벌을 맞이하는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대처하게 되는데, 이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파리의 방문과 그들의 행동을 보며 한 가지 깨닫게 된 점이 있다.

가정집이 아닌 일반 시설에도 방충망은 보기 어렵다.

우리가 그들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인간이 사는 오피스에 들어오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생존이 중요하기 때문에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인간으로부터의 공격이나 재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나가기를 꽤나 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에게는 ‘창문’이라는 개념이 없는 듯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눈에는 투명해 보이는 통창을 통해 나가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혀 보지만, 밖이 훤히 보이는데도 결국 유리에 막혀 나가지 못하고, 수많은 시도 끝에 창틀에서 몸이 뒤집힌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RIP.


왜인지 엎드러진 채 죽어 있는 경우가 많아, 안 그래도 가느다란 다리가 끝이 바깥으로 벌어진 채 굳어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가기 위해 투명한 창문과 사투를 벌이는 파리를 보다 안타까워, 앞서 말한 90도 각도의 손잡이로 위쪽 틈을 열어 주기도 하고, 아예 창문 전면을 활짝 열어 주기도 한다. 분명 옆에 틈이 열려 있고, 더 이상 막혀 있지 않은 길,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자연으로 뚫려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미 여러 번 부딪혀 사투를 벌였던 유리창 쪽으로만 계속 돌진하다 결국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파리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며 이것이 단지 파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역시 적응의 동물인지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응하는 데에는 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특히 뇌에서 정보를 처리하고 예측하고 대응하며 학습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우리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보다 안전하고 익숙하며 이미 검증되었다고 여겨지는 길, 내가 이미 학습해 왔거나 타인의 사전 경험을 통해 그렇다고 알려진 길, 사회적으로 많이 선택받은 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마치 남극에서 ‘퍼스트 펭귄’이라 불리는 대장 펭귄이 먼저 바다에 입수한 이후에야 다른 펭귄들이 포식자의 위험을 무릅쓰고 단체로 뛰어드는 것처럼.


이는 삶의 방식뿐 아니라 옷을 입는 방식이 될 수도 있고, 저녁 메뉴를 고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며, 모든 ‘선택’에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틈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뒤도 돌아보지말고 튀어보자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밖으로 나가려 했던 파리도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아니, 밖이 훤히 보이는데 왜 보통처럼 날면 날아지지 않는 거지?’


그 작은 몸이 차가운 유리창에 부딪힐수록, 자기 비행 실력을 의심하며 자기 의심과 불안 속에서 시들어 가면서도, 더 힘을 내 더 세게 유리창으로 몸을 던졌던 건 아닐까.


조금만 고개를 들어 창문 손잡이처럼 각도를 달리 바라볼 수 있었다면, 열린 문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조금만 눈치챘다면, 파리의 눈에는 똑같이 보였을 야외 풍경일지라도 진짜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탈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예전에 SNS에서 한 일본 초등학생이 쓴
“도망친다고 욕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이왕 살기 위해 도망치거나 탈출을 감행해야 한다면, 파리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긴박한 상황일수록 숨을 한 번 고르고, 고개를 조금만 돌려 나를 살게 해 주는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지 느껴보고, 지금까지 시도한 방향이 잘 먹히지 않았다면 더 이상 날개가 바스러지기 전에 각도를 바꿔 다른 틈이 있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몸이 뒤집혀 배를 드러낸 채, 팔다리가 굳은 모습으로 창틀에서 발견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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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방충망이 없어 기깔 나게 좋은점: 하늘이 미친듯이 아름다울때 상체를 창문 밖으로 내밀어(물론 떨어질 정도로 위험해서는 아니된다) 하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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